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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으로 산다는 것
제목 팬으로 산다는 것
등록일 2008.09.22 조회 5358
정은희 이미지
정은희미래전략연구실
연구원

휴 그랜트 주연의 영화로 잘 알려져 있는 동명의 소설 『About a Boy』의 작가인 닉 혼비(Nick Hornby)는 자신의 광적인 축구 사랑-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리미어리그 소속팀 아스날에 대한 사랑-을 『피버 피치(Fever Pitch)』라는 책으로 발표한 바 있다. 이혼 후 어느 날, 일주일에 한 번 아들을 만나던 저자의 아버지가 딱히 할 말도 없이 무미건조한 저녁식사 대신 택한 건 축구 경기를 보러 가자는 것이었고,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 따라갔던 축구장에서 그는 평생의 사랑이 될 아스날을 만나게 된다.

"나는 축구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마치 훗날 여자들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될 때처럼. 느닷없이, 이유도 깨닫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축구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그 사랑 때문에 앞으로 겪게 될 고통이나 분열 상태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다. …(중략)… 나는 고작 스토크를 상대로, 1-0으로, 그것도 상대 골키퍼가 막아낸 페널티킥을 도로 차 넣어 근근이 이긴 팀과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 『피버 피치』중

부모의 이혼, 새로운 곳으로의 이사, 중학교 입학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그에게 축구, 그리고 아스날과의 만남은 또 다른 세상을 열어주었다. 혼비를 포함한 아스날의 팬들에게 있어서 축구는 또 하나의 우주이며, 축구 외의 일상과 마찬가지로 진지하고 심각하게 스트레스를 안겨주고, 염려와 희망과 실망을, 그리고 이따금씩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당시 가장 지루한 “뻥축구”로 악명 높았던 아스날의 팬으로 산다는 것은 “재미없는 축구를 한다”는 팀에 대한 비판을 함께 짊어지고 가야 했던 일이며, “왜 넌 하필 그런 팀을 좋아하니?”라는 주변의 비웃음도 숱하게 들었어야 했을 것이다. 짜증나는 일상을 피해 팬의 세계에서는 조금 더 멋진 세상을 누려야 될 법도 한데, 새로운 우주가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리면 그렇지도 않다. 모든 팀은 굴곡을 겪고, 그건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패배할 때도, 그리고 승리하는 경기에서도 지지부진하고 멋지지도 않고 바보스럽다. 통쾌한 승리는 아주 가끔 나올 뿐이다. 이렇게 열한 살 생일이 지날 무렵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혼비의 수많은 일상의 순간들은 아스날의 경기와 맞물려 돌아간다.

그런데 이게 축구뿐이랴. 누군가의, 혹은 무엇인가의 팬이라면 “축구”를 그 대상으로 바꾸어 놓고 읽어보라. 아마 고개를 끄덕거리며 공감하게 될 것이다. 그 어떤 사랑 이상으로, 팬이 된다는 것은 일상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는 대형 사고라는 것을. 내가 응원하는 그 상대가 매우 뛰어나서 팬이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진짜 무서운 건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랑이 시작되어 형편없고 지지부진한 모습에 대해 욕하면서도 미운 정이 쌓여버리는 경우라는 점에도 동감할 것이다. 이것이 중증에 다다르면 그, 혹은 팀의 흥망성쇠가 마치 나의 운명과 같이 가는 것만 같이 느껴지고, 이 단계를 벗어나 그냥 그들과 내가 같이 늙어가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관련이미지요즘 들어 부쩍 팬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야구 때문이다. 물론 나는 혼비처럼 중증(?)은 아니지만, 기억할 수 없는 이유로 LG를 응원하기 시작해서 근 20년간 이 팀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물론 명문 구단으로 잘 나갔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미 오래 전 일이다. 2000년대 들어 LG는 꾸준히 하위권을 유지하고 있으며 올해도 8위가 거의 확정적이다. 경기가 끝나면 즐겨가는 야구 사이트의 회원들과 메신저에 모여 오늘의 어이없는 장면을 꼽아보며 신나게 욕하는 게 하루의 일과가 되어버렸고, 올림픽 전승우승에 빛나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홀로 리틀야구를 구사하는 팀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지긋지긋하게 안 풀리는 경기를 보면서 화를 내고 재미있게 야구를 하는 팀으로 눈을 돌리리라 생각해보곤 하지만, 그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 이 지긋지긋한 사랑은 일상이 되어 오늘도 계속된다.

어머니 말씀대로 그깟 공놀이에 화낼 필요도 없고 안 보면 그만인 것을, 왜 나는 오늘도 이들의 경기를 보며 열을 확확 받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피버 피치』를 뒤적이며 새삼스레 깨달았다. 살기 싫다고 일상을 살아내지 않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이렇게 난 이 팀을 버릴 수 없음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이 팀과 함께 하며 되도록 곱게 늙을 방법이나 생각해 보는 중이다. 경기를 보며 늘어만 가는 미간의 잔주름과 날로 거칠어져가는 입이 그걸 가능하게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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