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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박지현

두고 온 이들을 위한 기술 혁신

  • 작성자박지현  부연구위원
  • 소속통신전파연구본부
  • 등록일 2021.11.29

나는 예전에 한동안 영문 윈도우가 설치된 컴퓨터를 사용한 적이 있다. 생각보다 많은 자잘한 국내 소프트웨어가, 고작 영문 윈도우 앞에 날 것의 에러를 표출하며 저항했다. 설치가 안 되는 것, 설치 화면의 글자가 다 깨져서 어느 버튼을 눌러야 할지도 알 수 없는 것, 설치 후에도 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여러 가지였다. 당시 다수의 사용자가 한글 윈도우에 익스플로러를 썼겠지만, 리눅스도 맥 OS도 아닌, 라틴어도 크롬도 아닌 영문 윈도우 환경에서조차 테스트를 안 해봤던 걸까? 

한글 윈도우에 익스플로러 사용자가 당시 자사 소프트웨어의 잠재적 사용자의 70%를 차지할 수도 있다. 일은 늘 많고, 사람은 늘 부족하니 개발사는 일단 비용효율적인 다수의 고객층에 집중하자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좀 더 완성도를 높이고, 좀 더 돈을 벌고, 좀 더 사람을 뽑은 다음에 나머지 10%를, 그 뒤의 5%를 위한 설계를 하자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실제 어떤 회사들은 영어 버전의 소프트웨어를 따로 제공하기도 했다. 빨리 가기 위해 버리고 가는 것, 나는 그것을 일종의 부채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 개발사들은 이후에 부채를 갚았을까? 그들은 부채를 수첩 어딘가에 적어놓고 기억은 하고 있을까?

한때 연구실에 있던 AI가 이제는 부쩍 사람들 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비슷한 물건을 골라주고, 그림에 자동으로 채색도 해주고, 여러 가지 설계 도면도 시범 삼아 뽑아준다. 판례도 대신 찾아주고, 간단한 기사도 써준다고 한다. 서비스직의 무인화도 최근 눈에 띄게 진행되고 있다. 매연을 마시던 주차장 안내요원도, 마트의 계산원도, 주유소 직원도 하나둘 줄어들고 있다. 기계와 컴퓨터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은 예전에도 있었지만, 예전과는 또 다른 세대의 기술이 체감할 만큼 다가온 지금, 사람들의 그러한 걱정도 다시 커진 것 같다.

소비자로서 사람들은 발전된 기술의 혜택을 누리지만, 노동자로서 사람들은 기술이 칼이 되어 자신의 밥줄을 끊을까 걱정한다. AI와 같은 최첨단 기술의 위에 일하는 소수의 엘리트들과, 기술 아래에 일하는 다수의 단순직들로 사회가 재편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테크 플랫폼에 새로 생기는 일자리들 다수가 일을 제공할지언정 안정이나 발전을 제공하지 않아 이러한 걱정을 증폭시킨다.

기술이 일자리를 줄일 것이라는 두려움은 기본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일의 총량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에 기초한다. 새로운 수요가 생겨서 결국은 또 다른 일자리로 흡수될 것이라는 기대도 대부분 시장에서 잘 팔려서 돈이 될만한 상업적인 수요를 기대한다. 사람들의 욕구는 한계가 있는데, 그리고 사람들은 쓸 돈이 없는데 수요가 계속 생기리라고 기대해도 될까?

예전에 로또 1등이 60억씩 빵빵 터지던 시절에, 로또는 사지 않으면서도 60억원이 생긴다면 뭐에 쓸지 고민해보는 것은 즐거웠다. 갑자기 돈이 남아돌게 되었다는데 즐겁지 않은가? 그런데 만약 상업성을 떠나, 진짜 기술 혁신이 잘 이루어져 생산성이 남아돌게 된다면 그 생산성을 쓰고 싶은 분야가 없을까?

앞서 내 컴퓨터에 깔리지 않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회사들이 부채를 남겨두었다고 불렀다. 표준화된 다수의 사용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배제된 부분 말이다. 이와 비슷하게, 먹고 살기 바쁘기 때문에 가장 비용효율적인 다수에 맞춰 설계한 사회가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 이것을 사회적 부채라고 생각해보자. 

도심에 인프라를 제공하는 게 가장 비용효율적이고, 표준적 체형의 성인에 맞춰 기구를 설계하는 게 가장 비용효율적이다. 아픈 사람보다는 건강한 사람의 가장 건강한 연령대에 맞춰 일을 설계하는 것이 가장 비용효율적이다. 사람에 시스템을 맞추기 보다는, 시스템에 사람을 맞추는 것이 비용효율적이다. 처음 70%의 사람에게 제공하는 물건은 만들기 쉽지만, 95%에서 추가되는 1%의 사람까지 포괄하는 물건은 만들기 힘들다. 

그런데 만약 우리에게 생산성이 남아돈다면, 언젠가는 비용효율적이지 않아서 미뤄놓았던 사회적 부채를 갚을 수가 있지 않을까? 미뤄두고 잊어버린 부채들을 하나하나 꺼내보면 할 일이 생각날 것이다. 남아도는 생산성을 무엇을 위해 쓸지 상상할 수 있다면, 그래서 할일이 자꾸 늘어나고 일할 기회도 충분히 제공될 거라고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기술의 진보를 더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당장 돈이 되지 않는 마지막 몇 %의 인구를 위해 생산성을 쓴다면, 처음에는 무척 아깝게 느껴질 것이다. 특히 마지막 몇 %가, 자신들을 위해 추가적인 노력을 들여 설계된 것에 그만한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돈이 안 되는 분야에 돈이 가게 만들려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기술 혁신과 생산성 향상을 이루는 데는 소수 엘리트들의 기여가 가장 클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 전체적인 생산성을 어디에 쓸 것인지는 사람들의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기술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나기 쉽다. 내 주머니에 들어오지 않은 로또 당첨금처럼, 아직 내 주머니에 들어오지 않은 생산성을 누구를 위해 쓸건지 궁리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사실 나는 결국에는 마지막 몇 %를 포함하는 설계가 돈이 될 거라고 기대한다. 많은 명품은 그런 단계를 밟아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노하우는 낭비가 아니라 내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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