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나는 또래 아이들보다 다소 왜소했었다. 운동회 때 달리기는 항상 뒤에서 1, 2등을 다투어야 했고 씨름이나 팔씨름 같은 건 감히 생각지도 못했으며 그나마 사람이 많이 필요한 축구경기에서는 항상 최종 수비수가 내 몫 이었다. 그래서 몸으로 하는 내기는 항상 자신이 없었고 선뜻 응하지도 않았다. 내기를 할 때마다 지기 일쑤인데 어린 영혼이 내기를 좋아할 리가 없다. 그러나 투입이 많으면 산출도 많아지는 법. 변성기, 사춘기를 거치면서 내 몸은 풍선처럼 불어났고 꾸준한 연습은 나를 공격수 포지션으로 인도했다. 예전과 달리 체육시간이 즐거웠고 몸으로 하는 모든 게 자신 있었으며 또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 체육대회 때면 여러 종목에서 수요가 많았으며 만인의 기대를 안은 ‘대표선수’의 소임도 주어지곤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운동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했던 시절에도 난 뭔가 내기를 하는 경기는 이상하리만큼 매번 패하기만 했다. 그 뒤 내기가 걸린 모든 경기는 반갑지 않았고 내기만 하면 진다는 생각은 어느덧 징크스로 자리 잡았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고 승패와 관계없이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난 여전히 내기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내기에 졌을 때 느껴지는 징크스의 재확인이 승리에서 오는 달콤함보다 여전히 더 큰 셈이다.
그러나 재작년의 어느 날, 신문에서 읽은 한 사설(임철순, “중국의 패배철학,” 한국일보, 2004년 8월 30일)은 내가 왜 이런 징크스를 갖게 됐는지 어느 정도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사설은 중국 랭킹 1위인 프로바둑기사 구리(古力) 7단이 이창호 9단에게 아쉽게 역전 석패 당한 뒤 한 신문에 기고한 글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모든 경기에는 스스로 최선을 다해 참가하면 되는 것이며, 승부는 결코 자신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만 그 속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축적할 수 있게 된다.
반드시 이기려는 갈망을 가져야 하지만, 진솔하게 실패를 받아들이는 심리적 자질도 갖춰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빠르게 컨디션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며 다음 도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승부는 이미 결정났으니 더 이상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실패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실패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역량을 쌓고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것이 자신은 물론 상대에 대한 최대의 존중이다.
패배에 대한 마음가짐. 난 그것이 부족했었다. 내기에 자꾸 패하던 어린 마음은 승리에 대한 기쁨을 누리는 방법은 알았으나 패배를 받아들이는 방법은 잘 몰랐던 것이다. 만약 어려서 이런 패배에 대한 철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더라면 난 진정 내기를 즐길 수 있진 않았을까.
새해가 되자 또다시 여기저기서 내기를 하자는 얘기가 들린다. 금연, 결혼, 합격 등의 일년지대사를 놓고 자기 자신과 또는 친구와 내기를 건다. 나도 내 자신과 내기(?)를 했다. 올해는 징크스를 이겨보자고 말이다. 아마 연말에 가서 난 또 이 징크스를 떨구지 못했어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변화는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패배에 대한 자세는 예전과 다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