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 중에는 지구 자기장을 감지해서 방향을 찾는 종이 있다고 한다. 점점 굵어지고 있는 빗줄기를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방향을 잃은 채 근 삼십 분간을 도간 경계를 지속적으로 넘나들고 있으니, 그동안 참을성있게 길찾기를 기다리고 있던 동행자가 마침내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꼭 타야 된다고 말씀해주신 국도는 이미 스치듯 안녕한지 오래되었고, 날이 많이 궂어서 그런지 길을 물어볼 차도 행인도 눈에 띄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가 어딘가 하는 순간에 넓었던 차선마저 편도 일차선으로 줄어버렸다. ‘나는 철새다, 철새......’라고 자기 최면을 걸고 다시 얼마간을 꿋꿋이 달렸지만, 목적지는커녕 띄엄띄엄이나마 보이던 이정표마저 없어져 버렸다. 가슴이 철렁, 네비게이션 달 것을 그랬다 싶을 때 철새 본능인건지 아닌지 어찌어찌 도착했다.
항상 이런 식인 천하의 길치와 같이 살면서 길 헤매는 게 익숙해질만도 하건만, 최근 네비게이션 가격이 앞으로 헤맬 기대 비용 대비 적정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는지 아내가 하나 장만하길 권했다. 나도 일전에 최첨단 DMB 네비게이션으로 무장한 선배님의 차량을 탑승해본 결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차라 겉으로는 못 이기는 체하고 구매해버렸다.
집에 도착한 네비게이션을 보면서 이걸 달고 어디를 가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길 모른다는 핑계로, 너무 멀다는 핑계로 뵙지 못했던 여러 친지들, 길잃고 헤매느니 차라리 집에 있겠다면서 자진 포기한 여행지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 먼저 떠오른 것은 아마도 마음 깊은 곳을 누르고 있는,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한데다가 이제는 뭔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죄책감 비슷한 감정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기 테스트를 할겸 근처에 장을 보러 가는 도중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며 생전에 이 분들께서 해주신 여러 말씀들이, 특히 제대로 듣지 않았던 많은 충고들이 생각났다. 나름대로 말 잘 듣는 축이었건만, 네비게이션이‘좌측 두시 방향 횡단보도 지나 우회전입니다’라고 할 때 아홉시 방향 좌회전해버리듯이, 그때 나는 몰랐지만 그 분들은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던 일들도 꽤나 많았다. 그러다가 어느덧 도로 사정을 파악할 때쯤 되어 보니, 길을 알려주시던 많은 분들이 같이 여행가자고 권해드리기도 전에 훌쩍 멀리도 떠나버리셨다. 이런저런 추억과 상념 끝에는 이제 물리적 네비게이션을 달고서야 나의 정신적 네비게이션이 되어주신 분들을 찾아갈 생각이 나니 나도 참 어리석구나 하는 후회가 왔다.
문득 룸밀러로 그간 아빠가 차를 몰고 헤맸다는 사실도 모른 채, 뒷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광고에서처럼 우유를 주며 사랑한다고 매일 세 번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아이에게는 내가 최고의 네비게이션이 되어야 할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 분들도 나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가지셨었겠지. 이런 생각에 구석구석 퍼져있던 따뜻한 피가 두근두근 심장으로 몰려오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