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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여재현

종이 3장을 썼는데 나귀가 없다.

  • 작성자여재현  선임연구위원
  • 소속통신전파연구본부
  • 등록일 2023.04.04

지나치게 잘난 척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선비가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잘난 척하는 선비 앞에서는 굽신거렸지만, 뒤에서는 놀려댔다. 어느 날 선비가 지나가던 나귀 장수로부터 나귀 한 마리를 사게 되었는데 그 매매 확인서를 자신이 쓰겠다고 한다. 나귀 장수는 그러라고 하고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선비가 확인서를 주지 않는다. 슬쩍 쳐다보니 두세 문장이면 되는 확인서를 종이 3장에 걸쳐 길게 써 놓고 있다. “다 되셨습니까?” 물어보니, “이제 막 나귀 려(驢)자를 쓰려고 하는데 왜 이리 급하게 재촉하나?”라고 버럭 화를 낸다. 나귀를 사고파는 글을 3장이나 썼지만, 나귀라는 글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니, 길게 글을 썼지만, 본론으로 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이야기다.  

종이 3장을 썼는데 나귀가 없다는 사자성어 삼지무려(三紙無驢)는 잘난 척하거나 핵심을 말하지 못하는 지식인을 비꼴 때 쓰는 말이다. 연구자로서 보고서를 쓰면서 저 말을 되뇌곤 한다. 보고서에 나귀는 나와 있는 것인지 반성한다. 능력이 모자라 핵심은 쓰지 못하고 주변만 건드리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핵심은 알지만 쓸 용기가 없어 빙빙 돌아가는 이야기만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에라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나귀의 꼬리라도 보여줘야 할 텐데.

ChatGPT가 요란하게 세상에 등장했다. 이를 써 보니 삼지무려(三紙無驢)는 더는 못할 것 같다. 누구의 글인지 알 수 없고, 허락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도 모르겠으나, AI가 세상에 있는 글들을 열심히 공부해 정리해준다. 논쟁이 되는 이슈에 대해서는 찬반 양쪽의 의견을 모아 주기도 하고, AI가 학습을 통해 얻은 자신만의 소신을 주장하기도 한다. 쓸데없는 미사여구나 포장 없이 싫든 좋든, 옳든 틀리든 나귀라는 글자를 써준다. 좀 더 인간과 가까워지면 삼지무려를 즐거이 하는 AI도 등장하겠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AI가 틀리게 쓴 나귀를 우리는 구분할 수 있을까?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AI와의 논쟁에서 이겨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까? ChatGPT 초기에 저자가 연구하는 분야의 내용을 질문하니 전체적으로는 잘 설명하지만, 중요 세부 사항 중 하나는 잘못되게 답한다. 나머지 부분은 맞게 답하기 때문에 이쪽을 모르는 사람은 전체가 다 맞는다고 잘못 판단할 수 있다. 틀린 부분을 지적하니 혼란을 줘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렇지만 자기의 답도 여러 답 중 하나라고 변명한다. 다시 정답을 가르쳐줬더니 미안하다고 하면서 자기가 틀렸고 저자가 쓴 답이 정답이라고 답변한다. 1주일 뒤 같은 질문을 다시 물어보니 해당 부분에서 또 다른 틀린 답을 한다. 아마 저자가 알려준 정답과 또 다른 답들을 학습하면서 답이 변했나 보다. 이 글을 쓰는 오늘도 확인해보니 정답에 좀 더 가까워졌으나 아직도 틀린 답을 한다. 언젠가는 정답을 맞힐 날이 오겠지?

ChatGPT는 마이크로소프트의 구글에 대한 반격이다. 크롬, 검색엔진, 유튜브 등 이용자에게 정보를 전달해주는 앞쪽 끝(front-end)을 모두 장악한 구글에 대항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구글의 앞쪽 끝이 알고리즘에 기반한 선택적 정보 채택을 통해 확증 편향을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면, ChatGPT는 앞으로 어떻게 세상을 편 가르게 될지 궁금하다. 풍부한 지식기반의 서술을 통해 논리적으로 완벽한 거짓말을 할 때 세상은 더 강하게 나눠질지도 모른다.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들과만 소통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강하게 배척하는 현재의 풍토가 더 강화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다 안 좋은 상황만을 생각할 때의 이야기다. 긍정적으로 보면 인간의 생산성 향상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아직은 공정한 연구자가 세상에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좀 더 논리적이고 우회하지 않으면서 설득력 있게 나귀를 써야 하는 어려움이 더 많이 늘어났지만 말이다. AI의 공부 거리를 생산하는 자로서라도, AI의 편향을 막아주는 자로서라도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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