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서비스 규제정책에 있어서 시장의 획정과 경쟁상황평가는 대단히 중요한 절차이다. 규제의 대상과 범위, 수준 등을 결정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연구원은 오래전부터 관련 연구과제들을 수행하면서 전문성을 키워왔고 특히 통신시장의 변화에 대응해 어떻게 시장획정과 평가의 합리성을 확보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해오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변화들을 보면, 이제는 고민과 준비의 단계를 넘어서서 중대한 과제들을 바로 면전에 직접 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첫째, 지난 3월에 발표된 정보통신부의 통신규제정책 로드맵에 나타난 정책의 기본방향은 한마디로 규제의 완화와 경쟁활성화이다. 그동안의 통신규제가 통신산업의 특성과 공익성을 강조하며 시장에 대한 직접적인 정부의 개입을 정당화했다면, 앞으로는 사업자들이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통신분야의 역동적인 성격을 맘껏 발전시키며 선도해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정부의 개입을 요구했던 통신산업의 특수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고 지배적 사업자에 대한 합리적인 규제는 여전히 경쟁활성화의 필수조건이므로, 정부의 역할이 반드시 축소된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시장의 변화를 모니터링하고 규제가 필요한 대상을 신중하게 식별하는 측면에서는 더 적극적이고 전문적인 기능의 수행이 필요하다. 시장획정과 경쟁상황평가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과거에는 정부의 정책의지가 우선이고 경쟁상황평가가 이를 뒷받침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했다면, 향후에는 시장을 평가하고 규제대상을 식별하는 것이 규제당국의 주업무가 되고 규제의 부과는 이로부터 도출되는 부속절차가 된다고도 볼 수 있다. 시장획정과 평가가 이런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분석방법의 엄밀화, 적절한 의견수렴절차 도입 등을 통해 그 신뢰성과 투명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시장획정의 중요성이 높아질수록 시장획정안에 대한 이해관계자들의 문제제기는 증가할 것이고 이를 어떻게 수용하면서 투명성을 높여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큰 과제이다. 그동안 점진적 개선이 꾸준히 이루어져 왔지만, 이제는 이 분야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과 획기적인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로드맵에서 예고했던 바대로 세분화된 기간통신역무를 전송역무, 주파수를 할당받아 제공하는 역무, 전기통신회선설비임대역무 등 3가지로 통합한 개정 전기통신사업법 시행규칙이 지난 12월 15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러한 역무통합은 일차적으로 진입규제를 완화하고 결합서비스를 활성화한다는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그동안의 역무별 수직적 규제체계를 수평적 규제체계로 전환하는 첫걸음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수평적 규제체계에서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계위에 대해 동일한 규제원칙을 적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획일적인 규제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세부적으로 획정된 시장의 경쟁상황에 따라 규제여부와 수준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수직적 체계에서 규제의 단위가 역무였다면 수평적 체계에서는 경제적으로 획정된 시장이 되는 것이다. 통신규제정책에 있어 시장획정은 이제 필수적이고 핵심적인 절차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역무통합의 배경에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로서 서비스의 융합이 있다. 유무선대체 현상은 이미 수년간 진행되어온 것이지만, 결합서비스, VoIP, 와이브로의 활성화, IPTV의 도입 등이 곧 현실화되면 통신서비스들 간의 경계뿐 아니라 통신과 방송 서비스 간의 경계도 불분명해지게 될 것이다. 결국, 과거의 역무구분에 따라 시내, 시외, 국제, 이동 전화와 초고속인터넷접속 등으로 세분화하여 정의했던 시장들을 일부 통합하여 획정하거나 새로운 신규 융합, 결합 서비스들과 통합 획정할 것인지에 대한 이슈들이 앞으로 계속하여 제기될 것이다. 그런데, 시장 간의 통합획정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은 문제이다. 융합의 추세를 고려하여 통합획정을 적극 수용하는 경우 시장이 너무 넓게 획정되어 사업자들의 점유율과 지배력을 과소평가하게 될 수 있다. 서비스간 대체성이 높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각 서비스는 여전히 이질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을 수 있으므로 이를 단순히 통합획정하여 시장점유율을 계산할 때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유선과 이동 통화가 대체성이 높다고 판명되어 두 서비스를 통합 획정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동전화 서비스에는 이동중에만 발생할 수 있는 통화와 SMS 등 유선통화와는 실제로 이질적 서비스들이 결합된 형태로 포함돼 있으므로, 이는 유선 사업자의 점유율을 과소평가하는 오류를 발생시킬 수 있다.) 반대로, 단순 통합획정의 오류를 우려하여 구분획정을 유지하게 되면, 서비스간 대체성 증대를 인정하지 않고 좁게 시장을 획정하여 사업자들의 점유율과 지배력을 높게 평가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결국, 단순 통합획정이나 단순 구분획정 양자의 단점을 보완하고 절충할 수 있는 보다 세밀한 시장획정 방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시장획정의 중요성이 증대한 배경을 토대로 우리가 당면한 과제들을 살펴보았다. 매우 중요한 과제이면서도 여기서 다루지 못한 두가지 이슈는 바로 시장획정 및 평가가 사전규제의 전제조건으로서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과 도매시장에 대한 식별과 획정 방법론의 개발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