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방송통신위원회가 출범한 2008년의 끝자락인 12월에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입사하였다. 당시 방송통신위원회는 정책 목표 중 하나로 방송통신 통합법의 추진을 표방하였다. 방송통신 융합에 대응하여, 방송·통신 분야의 이원화된 규제체계를 수평적 규제모델에 따라 통합하겠다는 야심찬 구상이었다. 5년이 지난 지금, 그런 원대한 계획을 말하기는 조심스럽다. 그동안 방송통신기본법 제정 등 성과가 있긴 했지만, 수평적 규제 모델에 입각한 사업 분류체계의 도출 등 핵심 문제에서는 거의 진척이 없었다. 지난 경험을 돌이켜보면, 융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큰 문제보다는 작은 문제의 해결부터 노력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법제 개선의 지연에도 불구하고, 방송·통신·인터넷을 가로지르는 디지털 융합은 꾸준히 진행 중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애플과 구글이 글로벌 ICT 세계의 리더로 부상함에 따라, ‘콘텐츠 장터’를 제공하는 플랫폼이 디지털 생태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방송 부문에서도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해외에서는 훌루, 넷플릭스 등 인터넷 기반의 동영상 서비스가 인기를 끌면서 전통적인 유료방송(케이블·위성방송)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다.
인터넷 기반 디지털 생태계의 형성 및 동영상 서비스의 출현은 수평적 규제모델에 비추어 어떤 함의를 지닐까? 과거 2007년 방송통신융합추진위원회 의 논의에서 구 정보통신부의 2분류안(전송-콘텐츠)과 구 방송위원회의 3분류안(콘텐츠-플랫폼-네트워크)이 대립했던 것을 회상하면, 작금의 상황은 일견 3분류안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시 방송위가 플랫폼을 따로 분류한 데에는 IPTV 같은 신규 서비스에 대해 ‘공익성’에 입각한 방송규제를 적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반면, 최근의 플랫폼 개념은 앱 마켓, 스마트 TV, OTT 서비스 등을 포함하는데, 이들 중에서 ‘실시간 방송’과 유사한 콘텐츠 제공은 일부에 불과한 경우도 있어 플랫폼에 대한 방송규제의 적용은 대단히 신중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인터넷 기반의 동영상 서비스와 전통적인 유료방송 서비스가 점차 경쟁 관계에 진입하면서 기존의 방송규제에서도 플랫폼 계층(방송채널의 구성·운용)과 콘텐츠 계층(방송채널 내용의 편성)에 대한 규제원칙을 각각 달리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특히, 유료방송 플랫폼에 대해서는 인터넷 기반 동영상 플랫폼과의 규제 형평성을 고려하여 전통적 공익성보다는 경쟁원칙을 규제원칙으로 삼고, 다만 경쟁 조건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방송채널의 구성·운용과 관련된 사회문화적 규제(공익적 성격의 채널 운용 등)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 가지 문제는, 현 방송법의 방송사업 분류체계는 계층 구분이 제대로 적용된 것이 아니어서 콘텐츠-플랫폼 규제원칙을 차별화하는데 어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케이블방송은 대표적인 방송플랫폼 서비스이지만, 실상 방송법의 ‘종합유선방송사업’은 플랫폼 기능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방송법은 SO에게 지역채널을 운용할 의무를 부여하고, PP 등록 없이 제한된 수의 직접사용채널을 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 때문에, SO 사업내용 중에 콘텐츠 서비스가 포함되어 있다. 지역채널과 직접사용채널은 방송법의 채널 분류체계(종합편성·전문편성채널)에서 빠져있어 편성 규제도 받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려면, 궁극적으로 지역채널과 직접사용채널의 운용은 플랫폼 사업에서 분리하여 콘텐츠(PP)사업으로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단기적으로는 SO 사업내용에서 플랫폼 부분(방송채널의 구성·운용)과 콘텐츠 부분(지역채널 편성)을 ‘모듈화’하여 향후 분리가 가능하도록 하고, 편성규제 대상에 당해 채널들을 포함시키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향후 전통적 방송플랫폼 뿐만 아니라 인터넷 기반 동영상 플랫폼까지 포함하는 수평적 규제모델을 실현하려면, 우선 방송 부문 내에서 플랫폼-콘텐츠 계층 구분에 장애가 되는 요인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 지역채널과 직접사용채널의 문제는 일견 사소한 사안처럼 보이지만, 작은 문제의 해결이 없다면 큰 문제의 해결도 어려울 수 있다. 최근 SO 허가업무의 미래부 이관을 둘러싸고 여야가 대립하여 정부조직법 개정이 지연된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