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세계 최고의 ICT 기업 중 하나의 한국법인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글로벌 기업답게 많은 외국인들이 일하고 있었는데, 전세계 어디든 엔지니어들은 본인이 원하는 지사에서 일할 수 있게 허용하는 게 신선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회사에서 일하는 많은 미국인 프로그래머들을 포함한 엔지니어들이 한류 때문에 한국에서 일하는 걸 선택했다는 사실이었다. 한류 열풍이 이렇게 ICT 분야에도 시나브로 영향을 주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한류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영화시장이다. 우리 영화의 국내 시장점유율은 2013년 기준 59.7%(관객수 기준, 영화진흥위원회)로, 매우 강력한 권역내 영화 보호정책을 펴고 있는 프랑스는 물론, 독일이나 이탈리아, 스페인 등 대부분 유럽국가보다 더 높은 편임이 잘 알려져 있다.
매체경제학에서 문화상품의 가치를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모형 중 하나인 '자가시장모형(home market model)'에 따르면, 한국영화의 남다른 경쟁력은 사실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문화상품의 가치란 시장의 크기에 의해 결정되는 제작비에 비례한다고 이 모형이 가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GDP규모로 측정되는 시장의 크기에서 압도적인 미국이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세계 영화시장을 지배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대표적 모형이 바로 이 자가시장모형이다. 그런데 이 모형에는 흥미로운 변인이 하나 더 포함되어 있는데, 바로 문화적 할인이 그것이다. 이는 문화상품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변인이기에 분모에 포함되어, 같은 콘텐츠도 이용자의 문화적 배경이 다른 시장에서는 가치가 저하되는 현상을 반영하게 된다.
이 모형에 따르면 시장 크기에서 우리는 세계최대 시장인 미국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 심지어 인도에 비해서도 작은 편이어서 문화상품이 경쟁력을 지니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콘텐츠 경쟁력이 영화시장에서 본 것처럼 상당한 수준인 것은 바로 '문화적 할인(cultural discount)'요인에서는 우리나라가 경쟁국들에 비해 나름의 산업적 이점을 지니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마침 글로벌 경제 체제에서 콘텐츠의 국경이 점차 낮아지고 있는 추세이니, 우리 문화상품들이 문화적 할인에서 경쟁국 상품들에 비해 유리하다는 점을 산업 전략 수립에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겠다.
영화를 한 사례로 들었지만, 우리 방송 콘텐츠도 그 경쟁력이 국내 시장규모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편이다. 상반기 최고의 화제작 '별에서 온 그대'가 아시아권에서 보여준 열풍이 이를 증명한다. 사실 '한류'도 따지고 보면 대장금을 비롯한 우리 방송콘텐츠가 터전을 닦고, 우리 음악을 K-pop이라 불리게 한 국내 아이돌 그룹들이 일궈낸 새로운 문화조류 아니었던가?
한국 콘텐츠 파워가 만들어낸 한류는 결코 방송이나 문화 콘텐츠 산업 내부에 머무르지 않는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ICT 산업은 바로 이 콘텐츠 파워가 성공의 절대적 역할을 하는 시대로 접어든 대표적인 분야다. 지금 인터넷 트래픽을 가장 많이 점유하고 있는 분야가 바로 유튜브 등을 통해 이용되는 동영상 콘텐츠라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ICT 산업이 물리적 네트워크가 수익의 원천이던 시기에서, 그 속에서 거래되는 콘텐츠가 수익을 좌우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고 있음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모바일메신저 시장도 그래서 가능성은 충분하다. 유독 큰 '고착효과(lock-in effect)'를 감안하면, 이미 가입자 규모에서 1위인 중국의 '위챗'이 장악하고 있는 중국 시장에서 우리나라의 '라인'이나 '카카오톡'이 성공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전지현과 김수현이 '라인'을 이용하고, 조인성과 공효진이 '카카오톡'을 이용하는 걸 40억 아시아인들이 보고 있기에 아시아권에서 이 두 자랑스러운 우리 서비스들의 미래는 어둡지 않다.
최근 중국에서 이 서비스들이 당국의 차단을 받아 논란이 된 바 있다. 정치적 이유로 보이지만, 그만큼 라인과 카카오톡 뒤에 있는 한류효과를 중국 당국이 의식하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할 여지도 없지 않아 보이는 요즘이다.
* 본 칼럼은 디지털타임스 8월 4일(월, 22면) [포럼]에 게재된 글입니다. (☞ 해당기사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