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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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공과 비전(Vision)

  • 작성자곽정호  책임연구원
  • 소속공정경쟁연구실
  • 등록일 2003.09.15

내 이름은 손오공(孫悟空). 다들 적어도 한 번쯤은 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화과산(花果山) 정상의 바위에서 돌원숭이로 출생하자마자 금정화안(金睛火眼)과 뛰어난 용력을 바탕으로 원숭이 나라의 미후왕(獼猴王)이 되었고, 영생불멸의 도를 얻고자 수보리조사에게 수도하여 근두운(夕斗雲)법, 신외신(身外身)법을 터득하고 동해용왕으로부터 여의봉(如意棒)을 얻어 천하를 호령했던 내가 아닌가. 그뿐인가. 나의 영명(令名)은 선계(仙界)와 불계(佛界)에까지 미쳐 옥황상제는 제천대성(齊天大聖)이라는 나의 별호를 인정하고 천상의 반도원(蟠桃院) 관리를 맡기기까지 했었는데. 그때 훔쳐먹은 9천년만에 한번 열린다는 천도(天桃)와 선주(仙酒)의 미향이 아직도 어른거리는데....지금 어쩌다가 요 모양 요 꼴이 되었지. 삼장법사(三藏法師)라는 어리숙한 중을 데리고 어떻게 저 멀리 있는 천축국(天竺國)까지 간단 말인가. 그리고 이미 영생불사(永生不死)의 몸을 지닌 내가 힘들여 거기에 갔다 온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의 꿈은 예전처럼 근두운을 타고 심팔만리 하늘을 날며 뭇 원숭이들의 왕노릇하고 여의봉으로 화려한 개인기(?)를 보여주며 재미있게 사는 건데.

천축국에 가면 정말 현세(現世)의 모든 생노병사(生盧病死)를 초월하여 새로운 경지(境地)가 열리고 인생의 진리(眞理)를 깨달을 수 있을까. 혼란스럽다. 혹시 서역여행에서 자꾸만 도망가려 하니까 감언이설(甘言利說)로 나를 현혹(眩惑)하는 건 아닐까. 아니지 손오공, 너는 어차피 손해보지 않는 장사야. 우선 천축길 동행을 안 하면 석가여래(釋迦如來)가 너를 다시 오행산(五行山)에 가두어 고행(苦行)의 수도(修道)를 하게 만들지도 몰라. 그리고 실제로 천축여행이 너에게 해탈(解脫)의 기회가 될 지도 모르잖아. 음,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사실 저 놈의 중도 정말 가치가 없는 일이라면 힘들게 죽을 고생하면서 먼 길을 가지는 않겠지. 하지만 천축에 도착해서 원래 약속과 틀리기 만 해봐라. 그땐 정말 선계, 불계고 뭐고 온 우주(宇宙)가 끝장나는 거야.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 천축여행(天竺旅行)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후부터 도망치고만 싶던 이 생활이 왜 이렇게 즐거운 거지. 이전과는 다른 소명의식(召命意識)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하고. 참, 희한한 일이야.

서유기(西遊記)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수호전(水滸傳), 금병매(金甁梅)와 함께 중국 명대(明代)의 4대 고전(古典)으로 꼽히는데, 당나라의 삼장법사가 불경을 가지러 천축에 가는 동안에 일어나는 모험을 소설형태로 구성한 것이다. 원문을 읽지 않았더라도 아마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삼장법사 등은 모두 낯이 익을 것이다. 이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처음에는 하루빨리 삼장법사로부터 도망가서 예전처럼 하늘과 땅을 누비는 화려한 생활을 꿈꾸다가, 삼장법사와 함께 천축으로 불경을 가지러 가는 동안 깨달음을 얻게 된다. 사실 서유기는 다른 고전(古典)들처럼 독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손오공이 가치 있는 비전을 꿈꾸기 시작하며 의미 있는 변화를 겪는 과정에 관심이 갔다. 즉, 손오공이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고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천축가는 일’에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되면서, 그는 무의미했던 천축여행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변화시켰고, 자신의 본질적(本質的)인 모습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초반부는 서유기(西遊記)의 스토리를 토대로 손오공이 상상했을 법한 생각을 개인적으로 각색하여 보았다.

비약인지는 모르지만, 사실 이러한 비전의 중요성은 서유기의 종교적(宗敎的)인 관점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며, 연구원에서의 우리 일상업무에도 충분히 연관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령 KISDI 연구보고서를 쓸 때 개개의 구성원이 담당하고 있는 연구 및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그것의 가치를 ‘단순한 노동업무’로 부여하는 것과 ‘국가·사회적으로 미치는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과는 현저하게 다른 연구결과를 초래할 것임은 자명하다. 19세기 독일의 서정시인이었던 힐덜린(Holderlin, Johann Christian Friedrich; 1770~1843)은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 그것이 전부다.’라는 격언을 남겼는데, 이는 각 개인이 내면의 비전에 대한 헌신 및 비전의 합목적성(合目的性)을 지니고 있는지에 따라 삶에 임하는 자세 및 열정이 전혀 다른 양식(樣式)으로 표출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의 공감여부는 각 자의 선택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KISDI의 모든 구성원들이 진정으로 ‘비전 있는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로 인해, 연구원에 근무하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비전을 가슴에 품고 이의 실현을 위하여 관련 연구에 가치를 부여하며, 도출된 연구성과를 통하여 미미하나마 IT 분야의 국가발전에 기여했다는 보람을 공유했으면 좋겠다. 또한 긴 인생의 여정에서 우리 모두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갈지는 모르겠지만, 먼 훗날 KISDI의 ‘Home coming day’에서 많은 선·후배들을 다시 만나면 삶에 충실한 모습으로 지나간 소중했던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왜 자꾸만 근두운(夕斗雲)을 타고 심팔만리(十八萬理)를 날던 그때가 그리워지는 걸까. 저팔계와 사오정은 잘 지내고 있을까. 정말 변화는 너무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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