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우리 연구원에 왔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어…저, 저건…축구자앙?!'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넘어서서, 나로서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조합이었다. 연구원과 진짜 잔디 축구장이라니. 실제로도 그 잔디밭에 사람의 발길이 닿는 것을 본 것은 이삼 개월 정도 지났을 즈음, 조심조심 잔디를 보호하며 산책하는 사람이 최초였다. 그 후로도 잔디밭에 들어가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려웠고, 스프링쿨러만 파바바밧 하고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 즈음부터 출퇴근시간을 이용해 그 잔디밭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해고, 연구원에 활용 가능한 갖가지 시설과 과실수가 즐비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맘때였다.
진입로
우리 연구원의 진입로는 여러모로 풍성하다. 봄에는 서너 가지 색깔의 철쭉이 그야말로 미친 듯이 피어나 촌스러우면서도 예쁜 꽃길을 연출해내고, 가을이 되면 반대쪽에서 감들이 대롱거린다. 처음엔 떫은감이겠거니 하고 맛을 봤는데, 의외로 단감이어서 몇 개 따와 우리 연구실에서 나눠 먹기도 했었다.
잔디밭
잔디밭은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의 안정과 시력회복에 도움이 되는 미덕이 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축구나 야구도 할 수 있고, 여차하면 신문지 깔고 앉아 통닭을 배달시켜 소풍 기분을 만끽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아스팔트가 아닌 폭신폭신한 흙과 잔디를 밟으면서 걷는 것은 건강에도 좋고 기분 전환에도 좋다.
잔디밭 주변
뱀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전해져 올만큼 친환경적이고 생태계가 잘 보존된 곳으로서, 여러 종류의 나무가 심어져(?) 있다. 봄에는 백목련, 적목련 꽃 등이 피어서 화려해지고, 다른 쪽에는 살구나무가 두세 그루 숨어 있다. 가을에는 단감이 열린다. 그리고 얼마 전 운동장 가를 거닐다가 발견했는데, 밤나무도 있었다. 아직 덜 영글어서 그대로 뒀는데, 추석에 고향에 내려가기 전에 몰래 따 가면 어머니께 칭찬을 받을 수도 있다.
뒤뜰
뒤뜰은 나무의 밀도는 낮지만 개체의 다양성과 활용성 면에서는 최고다. 여름이 절정일 무렵에는 등나무 벤치에 앉아 자두나무에서 채 성숙하지 않은 신 자두를 따먹을 수 있다. 그리고 추석 즈음에는 그 근처에 있는 대추나무에 달리는 푸른 햇대추를 따먹을 수도 있다. 그리고 겨울에는 나무의 몸집에 비해 무리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많이 열리는 모과를 따서 달작지근한 모과향으로 연구실을 채울 수 있다. 이런 다양한 먹을거리 외에도 장미나무, 벚나무 등 꽃나무들도 몸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체육실 - 체력단련실, 탁구장
비록 크지는 않지만 체력단련을 원하는 연구원내 모든 수요를 충족시키고도 남는 규모의 체력단련실. 나름대로 오디오와 비디오 시설이 다 갖춰져 있어서 원한다면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에 도달할 때까지 달릴 수 있다. 하지만 심각한 단점도 존재하는데, 멋진(혹은 예쁜) 트레이너의 친절한 가르침은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탁구장은 요즘 우리실 연구원들이 가장 빈번하게 이용하고 있는 시설로서(솔직히 고백하건대 탁구공을 2개나 밟아서 쭈그러트렸다), 대전 경기가 가능하기 때문에 식권 등을 건 피 튀기는 접전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다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인자하고 온화한 동료의 비열하고 비겁한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기쁨도 누릴 수 있게 된다.
샤워실
우리 연구원에서 내가 사용해보지 못한 공간이 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남자 샤워실이다(나머지 한 곳은 테니스장). 여자 샤워실에는 2개의 샤워기가 대기중이며, 비열하고 치열한 탁구경기를 끝낸 후 동료와 함께 샤워실에 들어가면 시합 때의 열의가 왠지 모를 씁쓸함으로 변하는 신비로운 순간과 조우하며 진정한 동료애가 싹트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직원휴게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여직원들이 아프거나 할 때 잠깐 쉬다 갈 수 있도록 침대 2개가 구비되어 있다. 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쉽고 깊게 잠들게 하는 마력을 지니 곳이기 때문에 알람을 맞춰놓는 등,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침대 옆 공간에는 수유실이 있다. 사용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아이가 있는 남자 직원들이 더 잘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이 외에도 닫힌 철문을 열고 나가면 말 그대로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양재천이 흐르고 있고, 근처에는 예술공원이 있어서 산책코스로는 최적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양재천 조깅로 한편에는 호박꽃이 만발하고 예술공원에도 수많은 대추나무와 모과나무가 있어서, 산책하다 배가 고파져도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우리 연구원은 각자 독립된 공간에서 생활을 하고 있어서 다른 조직에 비해 서로의 얼굴을 보고 커뮤니케이션 하는 시간이 짧다. 그리고 책상 앞에,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도 길다. 주변 공원이나 휘트니스센터까지 가는 게 부담스럽다면 점심 먹고 잔디밭이나 뒤뜰을 산책한다거나 15분짜리 탁구경기를 해보는 건 어떨까. 종일 혹사된 눈이 풀빛에 편안해지고, 나이와 반비례해 줄어만 가는 웃음도 늘어날 것이다. 억지로 웃는 표정만 지어도 진짜 웃음만큼의 효과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일상에서 소소한 재미를 발견하고 즐기는 것이야말로 동일한 조건에서 남들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