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에는 이미 기억 속으로 잊혀진 수많은 추억의 아이템들이 등장하였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아이템은 바로 모뎀이다. 90년대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로 대표되는 PC통신 시대의 모뎀은 우리의 생활 패턴을 바꿔놓은 핫한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야후, 라이코스, 다음, 프리첼 등으로 대표되는 웹 시대가 시작되면서, 모뎀은 느림보이자 구박을 받는 동네북으로 전락했다. 텍스트가 메인이었던 PC통신에 비해 그래픽과 이미지가 함께하는 웹 시대에서는 네트워크 속도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느린 속도의 모뎀을 쓰는 경우에는 이미지 하나 띄우는데 ‘라면 하나 끓이는 시간’이 걸린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을 정도이다.
일부 사용자들은 최신형 고속 모델 교체하면서 느린 속도에 대한 불만을 달랬으나, 재정상황이 여의치 않은 사용자나 학생들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무거운 ‘인터넷 익스플로러’ 대신 네스케이프社의 ‘내비게이션’ 같은 가벼운 브라우저를 쓰는 등 속도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들은 쾌적한 웹 서핑하기 위한 최소사양에 다다르지도 못했다. 결국 ADSL 등의 초고속망의 보급되고 이를 활용한 이른바 PC방이 탄생하면서 속도에 대한 불만은 일정부분 해소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네트워크 속도에 대한 불만과 불편함은 xDSL류의 초고속망의 필요성에 대하여 인지할 수 있게 되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서 초고속망의 도입 시기를 앞당기는데 일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예도 있다. 2013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OECD WPCISP(Working Party on Communication Infrastructure and Services Policy, 통신인프라·서비스정책 작업반) 제 50차 정례회의에서는 브로드밴드 네트워크 속도측정에 대한 의제를 논의하였다. 본 의제에는 3개의 민간업체가 측정한 OECD 회원국의 브로드밴드 네트워크 평균 속도, 속도 측정 빈도 등 통계 현황이 포함되었다. 이 3개의 민간 업체는 각각의 방법론에 따라 속도 측정을 했기 때문에 각각의 결과치가 절대성을 갖지는 못하지만 통계가 크게 차이나는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는 네트워크 평균 속도를 기준으로 크게 대부분 상위권, 중위권, 하위권 국가로 구분할 수 있다. 초고속망 보급률이 85%를 상회하는 우리나라와 일본 그리고 인터넷 기반이 잘 구축되어 있다고 알려진 벨기에와 스위스, 이스라엘 등이 상위권에 포함된 현황은 사실 이미 예상된 결과였기 때문에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정작 이 통계에서 흥미로웠던 사실은 하위권 국가들의 높은 속도 측정 빈도수이다. 특히 헝가리, 슬로베니아, 에스토니아 같은 네트워크 속도 하위권 국가들은 속도 측정 빈도가 OECD 국가들의 평균 빈도 보다 2~3배 이상 많았다. 반면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상위권 국가들은 매우 낮은 측정 빈도를 보였다.
다시 말해, 네트워크 속도가 느리면 불편함을 느끼게 되고, 현재 사용하고 있는 네트워크의 속도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속도 측정을 시도한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속도가 빨라 불편함을 못 느끼는 상위권 국가들은 측정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측정 빈도가 떨어진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위권 국가들은 이러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네트워크 속도 측정 개선에 대한 수요를 파악하고 이를 위한 정책을 마련하고 있으며, 사용자의 실제 데이터를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하는 만큼 그 효용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때로는 ‘불편함’은 ‘필요’를 만들고, 이는 더 나은 발전의 ‘시작점’이 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굳이 통신 분야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든 충분히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불편함’이 모든 ‘필요’의 시작점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암 같은 큰 병처럼 뒤늦게 발견하게 되면 완치율과 생존율이 떨어지는 것처럼,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불편함’을 느낄 때에는 이미 늦은 것일 수도 있다. 물과 공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둘은 인간의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지만, 평상시 우리는 이들의 존재 자체도 인식을 못하지 못한다. 그러나 최근 일본 원자력 사고, 중국발 미세먼지 등으로 우리는 물과 공기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세계 각국은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고 있지만 불행히도 이미 발생한 문제를 100%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내놓기 힘들뿐더러, 대안을 찾는다고 해도 우리는 상당 기간 불편함을 감수해야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보통 ‘불편함’을 느끼고 나서야 비로소 그 대안을 찾게 되는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미지의 새로운 영역에 대하여 회피적인 성향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정부는 기가 인터넷 추진, 주파수 경매 및 할당, 제4이동통신사업자 선정, IPv6 전환 로드맵 등 세계 1위의 인터넷 강국의 명성을 이어가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과연 이러한 정부 주도 사업에 대하여 불확실한 시장 전망과 수요 부족 등을 이유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세계 시장의 흐름을 보고 그 후에 세부적인 정책 및 전략을 짜도 늦지 않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언급한 암, 물, 공기 등의 사례를 참고해야한다. 현재 정부에서 내놓은 정책들에 대하여 정부차원에서의 면밀한 보완과정이 필요하다는 전제가 있긴 하지만 이러한 선제 정책시행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부정적으로 보기보다는, 급변하는 인터넷 시장에서 세계 1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지의 새로운 영역에 대하여 적극적인 정책 수립 및 시행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불편하면 이미 늦은 것이다. 우리는 남들 보다 한발 먼저 움직이고, 한 단계 먼저 생각하는 것이 필요한 현대 사회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