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충’, ‘급식충’, ‘틀딱충’, ‘김치녀’, ‘홍어’ 등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혐오의 말들이 넘쳐난다. 극도로 혐오한다는 뜻의‘극혐한다’는 표현은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쓰는 말이 됐다. 혐오의 시대, 혐오 공화국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혐오의 대상은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노인, 외국인 노동자, 탈북민 등 다양한 층위를 망라한다. 최근에는 제주도 난민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예멘 난민까지 혐오의 대상이 됐다. 혐오와 관련된 각종 신조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온라인 혹은 미디어 상의 혐오표현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혐오표현(hate speech)’이란 어떤 개인 혹은 집단에 대하여 그들이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차별·혐오하거나 차별·적의·포격을 선동하는 표현이다(국가인권위원회, 2016). 혐오표현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욕설이 아닌 사회적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공격이자 ‘차별행위’이기 때문이다. 혐오표현은 발언의 수위와 상관없이 차별을 조장하고, 차별은 또 다른 혐오를 만들어내며 공고화한다.
사회적 소수자를 조롱하는 혐오표현들은 온라인상에서만 목격되는 것이 아니다. 자유한국당 김문수 전 서울시장 후보는 유세 도중 “동성애는 흡연보다 해롭다”, “동성애로 인해 에이즈가 늘어난다”, “여성은 매일 씻고 다듬고 피트니스도 하면서 자기를 다듬어 줘야 한다”고 말해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중고등학교, 심지어는 초등학교 교실에서 혐오표현들이 유행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공직선거에 나서는 후보뿐만 아니라, 청소년들까지도 혐오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혐오표현들은 온라인 공간을 넘어 우리의 일상에까지 공기(空氣)처럼 퍼져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루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여 소비하는 미디어는 어떠한가?
MBC 인기 예능 프로그램인 <전지적 참견 시점>은 MC 이영자가 어묵을 시식하는 장면에서 세월호 참사 뉴스 보도 영상을 사용하여 논란을 일으킨 바 있으며, <러브인아시아>나 <글로벌 아빠 찾아 삼만리>와 같은 이주민 프로그램은 이주민을 시혜의 대상, 수동적인 대상으로 그린다는 비판을 받았다. 국민 개그 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는 노인비하, 여성비하, 막말 등으로 인해 ‘혐오 콘서트’라는 비난을 받은 지 오래다. 개그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영화에서도 혐오표현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작년 56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한 영화 <청년경찰>은 중국동포들을 범죄자 집단으로 묘사하여 국내 중국동포 단체들이 대림동에서 시위를 벌이고 영화 상영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비단 이 영화뿐만 아니라, <황해>, <범죄도시> 등 중국동포가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영화나 드라마는 수도 없이 많다.
인터넷 개인방송 등 1인 미디어 상의 혐오표현은 더욱 심각하다. 100만 명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아프리카TV의 한 유명 BJ는 여성 출연자에게 ‘삼일한(여자는 3일에 한 번씩 맞아야 한다는 뜻의 은어)’ 등의 발언을 하고,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비하해 징계 처분을 받았다. 굳이 매스미디어 배양효과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미디어를 소비하며 현실을 지각하고 구성한다는 점에서 미디어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미디어 상의 혐오표현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다. 미디어는 특히 사회의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하여 논의하거나 논쟁을 주도하는 공간을 제시하는 ‘공론장’의 기능을 수행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미디어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의 모든 정치적·문화적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공론장의 의무를 지닌다.
현재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에 차별과 혐오를 경계하도록 하는 조항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정확한 기준이 없이 모호하게 적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여성가족부가 인터넷 개인방송 등 1인 미디어의 성차별적 표현과 혐오표현을 막기 위한 자율규제 가이드라인을 마련한다고 밝혔다. 드라마, 광고, 오락 프로그램 등에서 여성의 외모와 신체, 여성성에 대한 고정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거나 외모를 비하하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도록 하는 미디어 제작 가이드라인도 마련하기로 했다. 미디어 상의 혐오, 배제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고 가이드라인을 구체화하는 것이 가장 시급해 보인다.
미국을 대표하는 교육 지도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파커 J. 파머는 그의 저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에서 서로 다름의 차이에서 오는 다양성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긴장을 끌어안는 체제가 민주주의라고 역설한 바 있다. 파머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면서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악마화’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성소수자들의 축제인 서울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동성애 ‘반대’ 단체들이 광장을 포위하고, 특수학교가 ‘혐오시설’이라는 이유로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장애학생 부모들은 무릎을 꿇고 눈물로 호소한다.

출처: CBS노컷뉴스(2017.4.30), "'아직도' 성소수자 권리는 '시기상조'입니까", http://www.nocutnews.co.kr/news/4777012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을 파면시켰던 촛불집회도 어느덧 2주년을 앞두고 있다.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했던 광장은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세월호 유가족, 청소년 등 우리 사회의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혐오에 반대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나이, 지역, 성별, 이념이 각기 다른 1700만 명의 국민이 한데 모여 전 세계 유례없는 비폭력·평화 집회를 이뤄낸 경험은, 우리 사회가 차이를 인정하고 갈등과 긴장을 끌어안으며 더 나은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늘날의 미디어는 촛불이 보여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얼마나 부응하고 있는가?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대변해야 할 미디어가 오히려 이들에 대한 혐오를 재생산하고 편견과 차별을 고착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혐오와 차별보다는 평등과 존중, 사랑이 가득한 미디어 공론장을 꿈꾸며, 한 신문기사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혐오’의 적은 사랑이다. 혐오 세력은 사랑의 세계에 함부로 쳐들어가서 정죄하고 바꾸려 든다. 거꾸로, 사랑의 적은 혐오일까. 아니다. 사랑의 적은 없다. 사랑은 혐오 세력의 축제를 망치려 든 적이 없다. “사랑은 사랑(#LoveIsLove)”일뿐이라고 사랑은 외친다. 이들은 저주 대신 “긍지(#Pride)”로 차 있다. 사랑이 이긴다. 적이 없는 자가 결국 이긴다(한겨레신문, 2017.7.14).
|참고문헌|
국가인권위원회(2016),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
한겨레신문(2017.7.14), “‘성소수자 굿즈’단 목사·신부…스님도 무지개 염주 만들래요”,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02856.html
CBS노컷뉴스(2017.4.30), "'아직도' 성소수자 권리는 '시기상조'입니까", http://www.nocutnews.co.kr/news/4777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