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변화하는 인재 시그널
산업화 이후로 ‘학위’는 노동자를 선별하기 위해 중요한 핵심 시그널 역할로 기능해왔다. 인공지능 시대에 접어들면서 기존의 '학위'만으로는 산업현장에서 즉시 활용 가능한 인재를 식별하기 어려워졌고, 실질적인 ‘숙련(skills)’의 측면에서 수요와 공급의 미스매칭이 심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전통적으로 자동화의 영향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다고 느껴왔던 반복적이지 않거나 창의성이 요구되는 직무조차 생성형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다. 심지어 미래에 유망하다고 예측되었던 개발자 및 IT 인력조차도 기업의 감원 대상이 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특히 신입 인력의 일자리를 AI가 대체하는 현상은 청년층의 고용 기회를 위협하고, 노동 시장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기존에 대학이라는 고등교육 기관에서 학위를 취득하는 데 소요되는 등록금과 비효율적인 시간 낭비를 하지 말고 특정 기업(예: 미국의 팔란티어)의 학위를 따라는 기사도 나올 정도이다. '학위'보다 실무에 바로 투입될 수 있는 '숙련(skills)'을 보유하였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동향: 숙련 우선(‘skills-first’) 전략의 확산
유럽연합(EU)은 2022년부터 ‘인공지능 숙련 대연합(Artificial Intelligence Skills Alliance; 이하 ARISA)’을 출범하여 인공지능 시대의 인력전환을 위한 초국가적 대응에 나섰다. ARISA는 EU의 에라스무스+ 프로그램 펀딩으로 진행되는 4년간의 초국가적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노동자, 구직자, 비즈니스 리더, 정책결정자들이 인공지능 관련 직무에 적응할 수 있도록 재교육(upskilling, reskilling)을 제공하는 패스트트랙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ARISA는 ‘숙련’ 부족, 격차, 불일치를 해소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유럽의 인공지능 숙련 전략을 개발하고 인공지능 관련 지식과 숙련을 제공하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 및 커리큘럼을 개발하는 것을 세부 목적으로 한다. 2022년에 '수요 분석'과 '인공지능 숙련 개발을 위한 유럽의 전략'을 발간하고, 2023년부터는 구체적인 AI 숙련을 위한 커리큘럼, 학습 프로그램, 인증 방법 및 프레임워크를 마련하며, 2024년에는 인공지능과 관련된 직무를 위한 핵심 커리큘럼, 품질 라벨링 방법론을 개발하여 2025년 올해에는 교수자의 역량 강화를 위한 프로그램 디자인, 마이크로인증(micro-credentials) 및 인정 시스템 등 구체적인 단계까지 발전하였다.
OECD에서도 생성형 인공지능 도구의 발달이 숙련 수요(skills demand)의 변동을 가속화시키고 있다면서 노동 시장에서 '숙련 우선(skills-first)' 접근 방식이 부상하는 현상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OECD가 2025년에 발간한 <숙련 우선 접근 방식을 통한 인력 역량 강화>는 ‘숙련 우선’ 접근을 개인의 습득 경로와 무관하게, 입증된 기술·역량을 학위나 직책 등 전통 자격보다 우선시하는 채용·인력개발 관행으로 정의한다. 많은 고용주들이 학위 요건을 줄이고 실제 기술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채용 관행을 전환하고 있다는 것인데, 특히 OECD 국가에서 채용 담당자의 검색 활동은 ‘숙련’ 기준으로 필터링하는 비중(2023년 15%)이 ‘학위’만으로 필터링하는 비중(1.7%)보다 훨씬 높다고 보고하였다. 동시에 이러한 변화의 주요 동인으로 디지털 전환, 친환경 전환, 인구통계학적 변화와 같은 거시적 트렌드가 기술 수요와 직업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국내 현황: 숙련 기반 고용 신호의 등장
우리나라와 같이 고용에 있어서 '학위'가 중요한 신호로 작용해온 나라에서도 이러한 숙련 시그널링은 증가하고 있다. 전년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진행한 연구에서 수집한 우리나라의 인공지능 온라인 구인구직 공고(Online Job Postings, 이하 OJPs) 1,774개 중(2024년 7월 기준)에 '학력 무관'을 표시한 구인공고가 약 638개(전체 공고의 약 36%), '경력 무관'으로 표시한 구인공고는 약 855개(전체 공고의 약 48%)로 나타났다. 직무에서 요구하는 숙련이 있는 경우에는 경력이나 학력과 상관없이 인력을 채용하겠다는 인공지능 기업들의 강한 인재 확보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결과이다.
이처럼 개인의 '숙련'을 강조하는 고용 트렌드는 기회와 잠재적 위험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고용에 있어서 기회는 명확하다. 구직자와 구인자는 인공지능 산업계처럼 기술과 인력의 변화로 발생하는 숙련 수요에 더욱 빠르게 적응해 산업 현장의 인력 미스매치를 완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온라인 강좌, 직장 내 교육, 부트캠프 등 비전통적 경로를 통해 습득된 숙련을 인정함으로써 다양한 배경의 인재들이 노동시장에 진입할 기회를 확대할 수 있다. 하지만 당장의 기술 수요나 최신 트렌드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장기적 국가 인재 준비와 미래 인력의 적응력이 저해될 수도 있다. ‘숙련(skills)과 역량(competency)’ 중심으로의 성공적인 전환을 위해서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재교육(upskilling, reskilling)에 대한 대비와 핵심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전문가 양성이 모두 필요하다.
전 국민 대상의 포괄적인 숙련 향상 전략과 핵심 인재 중심의 엘리트 양성 전략 중 어떤 접근 방법을 취하는 것이 좋을까? 이러한 접근법에 대한 증거기반의 비교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다만, 7개국의 인공지능 숙련 정책을 검토·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재교육 전략이 국가 차원의 AI 역량을 강화하는 데 있어 더 효과적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Rigley 외(2024)가 2022년 기준 ‘정부 AI 준비도 인덱스(Government AI Readiness Index, GAIRI)’와 ‘글로벌 AI 인덱스(Global AI Index)’를 토대로 미국·영국·캐나다·스웨덴·호주·싱가포르·중국의 공식 정부 문서를 검토하고 AI 숙련 전략과 접근법을 비교한 결과에 기반한 것이다. 해당 연구진은 각국 정부 문서의 내용을 분석한 뒤 미국이나 싱가포르처럼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한 포괄적이고 전국적인 업스킬링 방식의 전략이 중국, 캐나다, 스웨덴처럼 소수의 뛰어난 인공지능 전문가를 양성해 내려는 국가들보다 더 높은 인공지능 준비도를 나타내고 있는 상관관계를 발견하였다. 비록 인과관계를 밝혀낸 것은 아니지만 향후 증거기반 정책 마련의 기초적인 연구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제언: 한국형 숙련 기반 인재 전략 수립을 위하여
이제 인공지능 시대의 인재 전략은 학위 중심에서 벗어나 숙련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글로벌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실질적 기술 역량을 갖춘 인재를 유연하게 발굴하고 육성하는 시스템이야말로 지속가능한 성장의 핵심이 된다. 우리 정부에서는 어떤 재교육 전략을 가져가야 할까? 첫째, 평생 학습 및 숙련 개발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 개인이 변화하는 기술 수요에 지속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유연한 학습 기회를 제공하고, 훈련 비용 지원을 포함한 평생 학습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 둘째, 기술 인정 및 표준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전통적인 학위과정이 아닌 학습을 통해 습득된 기술을 포함하여 모든 숙련에 대한 명확하고 표준화된 인정 및 검증 시스템을 개발하고 강화해야 한다. 특히 인공지능 관련 숙련은 해외 인재의 적극적인 유입이 있는 분야로 국내 인공지능 관련 비정형 교육이 세계 수준의 숙련(skills)을 갖출 수 있도록 기술자격증명(예: Micro-credential)의 신뢰성을 높이고 국가 간 상호 인정을 촉진하는 것이 좋겠다. 셋째, 노동 시장 정보 시스템 개선이다. 구인자와 구직자를 포함한 노동 수요와 공급의 연결을 촉진하고, 그리고 나아가 관련 숙련을 제공하는 교육 기관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을 포함한 모든 이해관계자가 정확하고 실시간적인 숙련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노동시장의 정보시스템을 개발하고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 이는 정보통신정책연구원 ICT 기반 사회현안 연구(2025)가 지적한 바와 같이, 국내 인공지능 관련 OJPs의 상당수가 일반 구인 플랫폼에 게시되지 않고(해당 기업 홈페이지에만 게시되는 사례 다수), 사람인·잡코리아·워크넷 등의 구인구직 정보만으로는 국내 전체 AI OJPs를 대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넷째, 노동 전환/비고용 상태에 대응한 재교육 연계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순환형 노동생애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인공지능 전공자뿐만 아니라 비전공자들도 업무 단위의 직무 변화가 일어나며, 그 변화 정도가 큰 직업군에서는 실질적인 실직이나 비고용 상태로 이어지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단순히 거시적 흐름으로만 보아 ‘기술적 실업’에 따른 재교육이라는 복지 정책만으로 다룰 것이 아니라, ‘고용–비고용–고용’을 노동자 생애주기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하고, 노동자의 역량을 생애주기에 걸쳐 강화하는 교육 정책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취약 산업, 취약 계층을 위한 재교육 지원뿐만 아니라 전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재교육을 어떻게 구상하고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지 학계와 실무단에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시기이다.
※ 본 기고는 연세대학교 디지털사회과학센터 [Issue Brief 디지털사회 제65호]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cdss.yonsei.ac.kr/index.php/issue-brief/?uid=221&mod=document&pageid=1
참고문헌
정보통신정책연구원. (2025). ICT기반 사회현안 해결방안 연구 (ICT 진흥 및 혁신 기반 조성사업 RS-2024-00331941) <제5장 인공지능 인재 숙련 수요 분석: 국내 온라인 구인공고를 중심으로>
Rigley, E., Bentley, C., Krook, J., & Ramchurn, S. D. (2024). Evaluating international AI skills policy: A systematic review of AI skills policy in seven countries. Global Policy, 15(1), 204-217.
OECD. (2025). Empowering the Workforce in the Context of a Skills-First Approach, OECD Skills Studies, OECD Publishing, Paris, https://doi.org/10.1787/345b6528-en.
ARISA. (2024). AI Skills Strategy for Europe.
https://aiskills.eu/wp-content/uploads/2025/04/ARISA_AI-Skills-Strategy-for-Europe_2024.pdf
ARISA. (2025). Design the train-the-trainers programme.
https://aiskills.eu/wp-content/uploads/2025/04/ARISA_Design-the-train-the-trainers-programme.pdf
조선일보. 강다은. (2025.04.24.). "대학서 돈·시간 낭비 말고 '팔란티어 학위'를 따라"
https://www.chosun.com/economy/tech_it/2025/04/23/GXLHQTJK2FDYHDWMSKOTZ6ZU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