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컨버전스 기반 미래연구(I)」시리즈(09-02)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의 의식과 행동’
“디지털 컨버전스 문명 속 인간의 실존적 선택,
우리는 어디로 향해 가는가?”
기술의 발전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으리라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이중적이다. 게임 속 아바타를 키우기 위해 자신의 진짜 아기를 유기해 버린 부부 이야기는 디지털 게임 속에 매몰된 인간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새로운 기술은 그동안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일들을 현실세계에 구현해 내고 있다. 그래서 기술이 인간을 보다 자유롭게 해 주리라는 장밋빛 전망 또한 가능하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원장 방석호)은 최근에 발간한 KISDI 디지털 컨버전스 기반 미래연구(I) 시리즈(09-02)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의 의식과 행동’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디지털 컨버전스가 가져올 인간의 미래 모습에 대한 철학적 탐색을 시도했다. 본 연구는 성균관대학교 철학과 이종관 교수를 비롯한 철학분야의 연구진에 의해 이루어졌다. 보고서는 컨버전스가 가져올 인간의 미래상에 대해 탈인간적 측면과 신인간적 측면의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면서, 궁극적으로는 기술을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하느냐 하는 인간 주체의 성찰적 힘이 중요함을 주장하고 있다.
새로운 가능성과 불확실성, 미래는 열려 있고, 기술은 그런 미래를 향해 있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 선진국들은 미래 세계경제의 향방을 첨단 융합기술에서 가늠한다. 이른바 NBIC(Nano+Bio+Info+Cogno) 융합기술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고, 관련 제품들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우리의 주변 환경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에는 인간 자신이 기술적 변화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인간의 신체를 수선하고 수리함으로써 버전을 올리는 일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컨버전스 기술이 묻는 인간의 조건은?
기술의 발전은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들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성과 생명 등 인간에게 고유해 보이는 것들이 하나하나 기술적 재구성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낯선 길을 찾아가는 일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길을 기억할 필요도 없다. 내 손에 작은 디바이스 하나만 있다면 길을 찾는 것만이 아니라 그 길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사건들과 관련된 정보와 판단들을 찾아낼 수 있다. 인간 정신의 많은 기능들이 두뇌 밖으로 빠져 나오고 있다. 또한 자신과는 미세하게 다른 후손을 생산해 내는 것이 창조적 생명성의 기준이라면, 실리콘 위에 구현된 대상들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기술은 묻는다. 무엇이 인간의 조건인가? 그 조건들을 만족시켜 준다면 인간이라 부르겠는가?
딜레마, 기술이 마련해 준 새로운 가능성과 정체성의 위기 사이에서
이처럼 첨단 컨버전스 기술은 미래의 인간을 딜레마로 몰아세우고 있다. 기술 지배 사회는 우리에게 인간성에 대한 전통적인 기준을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나아갈 것인지를 묻는다. 사회 변화 동역학의 요인으로서 기술의 발전은 그 기술에 적응해야 하는 인간들의 의식과 행동에 변화를 유발한다. 기술에 적응하고 적극적으로 향유하려는 힘과 새로운 변화에 저항하려는 힘 사이에는 일종의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 다양한 양상이 곧 컨버전스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 속 개인들의 의식과 행동의 경향을 대변한다.
컨버전스 기술들의 밑바탕에는 디지털 기술이 자리 잡고 있다. 서로 다른 영역의 지식과 기술이 서로 융합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들이 모두 디지털화를 통해 자연적인 경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즉 각각의 이질성이 디지털화라는 동질적 매개를 통해 새로운 하이브리드적 융합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디지털 세계관의 심층에서도 이중적인 힘이 맞서고 있다. 한 편으로 모든 것이 계산가능하고, 그에 따라 결정가능하다는 철학적 이념과 다른 한 편으로 계산 불능과 비결정성이 공존하는 것이다.
디지털 게임과 신화의 협력적 조화 속에서 보이는 힘의 갈등과 가능성
오늘날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동시에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디지털 게임들 속에서 차용되는 신화적 스토리들을 주목하면, 첨단 기술 사회가 우리의 의식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 본래 게임(놀이)과 신화는 동근원적이다. 그것은 해당 집단 속에서 공동체 의식을 길러주고, 그 공동체 속에서 소속감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다. 달리 말해 자신의 자기 정체성을 고립된 원자로서가 아니라 전체라는 집단의 네트워크 속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첨단 기술을 외면하며 살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환경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 기술은 한 편으로 인간에 대한 낡은 관념들을 한계까지 밀어 붙이며 인간 정체성을 흔들어 놓는다. 이 실존적 불안을 위무해 줄 수 있는 대안이 무엇인가? 한 편에서는 다시 기술로 돌아간다. 여전히 의지할 곳은 기술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는 차가운 기계적 이미지가 아닌, 좀 더 인간적인 풍취가 나는 것들에 주목한다. 그런 것들에서 자신의 인간적 존재를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들 사이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려 있기도 하다.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는 아이를 보고 기술이 인간을 고립시킨다고 말하지만,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SNS)들과 그 활동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기술의 발전이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새로운 네트워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을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하느냐 하는 인간 주체의 성찰적 힘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문의 : 미래융합연구실 황주성 연구위원(570-4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