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연구소 식당에 디지털TV가 설치되었다. 이 수상기로 시험용 디지털 지상방송을 보면 화질이 정말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오전에 한참 정신없이 일하다 점심식사 시간에 식당에 내려가면 디지털TV 덕분에 더욱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새로운 방송세계에 대한 경험은 약 일년 전에 겪어보았다. 내 동생은 동영상 매니아여서 조그마한 아파트 방 하나를 완전히 영상 전문 공간으로 꾸몄다. 고화질 프로젝터와 대형 스크린을 갖추고, 지상파 디지털 시험방송을 감상하기 위해 필요한 수신 장비도 설치하였다. 물론 음향스피커도 영상기기 수준에 걸맞은 것으로 장만하였다. 어느 날 동생 집을 방문하였더니, 미리 저장해둔 HD 동영상을 보여주었는데, 나의 눈과 귀를 믿을 수 없는 정도여서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와 같이 좋은 영상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은 상당히 많은 것 같다. 방송에 대한 별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좋은 화면과 좋은 음향을 구별할 최소한의 감각기능만 갖추고 있다면 디지털방송이 확산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전자제품에 대한 유별난 정열을 생각한다면.
디지털 컨텐츠가 부족할까봐 걱정할 필요가 별로 없다. 미국의 할리우드 덕분에 기존의 우수한 영화를 HD 방식으로 방영하는 것은 어렵지 않고, 시장만 확인되면 향후의 주요한 방송프로그램은 HD 방식으로 제작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10년 전에 구입한 수상기를 바꾸지 않고 있다. 마땅하게 수신할 디지털방송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마땅하게 수신할 디지털방송이 없다는 말은 컨텐츠가 없다기보다는 디지털방송을 전송하는 네트워크가 없다는 말이다. 국내 최대의 방송 컨텐츠가 전송되는 지상파는 전송망 디지털화 투자를 망설이고 있어 일부 지역만이 시험방송을 시청할 수 있을 뿐이다. 케이블방송 역시 영세한 자본구조 때문에 디지털화를 제대로 추진하는데 많은 애로를 겪고 있다. 통신사업자와 케이블방송이 공동으로 디지털화를 수행한다는 디지털미디어센터(DMC)는 구성 초기부터 사업자간 기득권 확보를 위한 갈등으로 인해 지지부진하고 있다. 어렵게 하늘에 올라가서 우여곡절 끝에 방송 전송을 시작한 위성방송은 지상파 재전송에서 막히고 아파트의 위상방송 수신기 설치도 막혀서 HD방송을 손쉽게 전송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활용이 막혀 있다. 인터넷을 통한 HD 방송의 시청은 아직 인터넷망의 전송속도 한계와 미흡한 품질보장으로 인하여 우리가 기대하는 디지털방송 전송망이 되려면 좀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꽉 막힌 HD방송 전송망 때문에 HD방송 녹화컨텐츠나 DiVX 파일을 인터넷에서 교환하는 현상은 문제가 될 정도로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이제는 과거와 같이 하나의 방송을 전송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오직 하나가 아닌 시대로 이미 변화하였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한 쪽 전송망이 막히면 다른 전송망이 중요해지는 시장의 법칙이 방송쪽에도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방송관련 사업자가 이러한 시장의 법칙으로부터 영원히 예외로 남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방송사업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디지털화를 조속하게 추진하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초고속인터넷 강국으로 부상케 한 과정을 들여다보면 시장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엄격하고, 준엄하며, 냉혹하기까지 하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 당시 초고속인터넷 사업자들은 수요가 거의 없을 것이라든가, 수익성이 없다든가, 필요 없이 지나치게 빠른 전송속도의 통신망 수요는 사치라든가 하는 이유를 대면서 투자를 망설였다. 그럼에도 경쟁은 무서웠고,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이런 기우는 큰 문제없이 해결되고 있으며, 국민은 세계 최고의 인터넷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방송사업자들이 디지털화를 하지 못하는 이유가 투자재원 마련 때문이라면, 시장의 경쟁은 오히려 재원을 마련할 방도를 찾게 해 줄 것이다. 방송사업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디지털화, 고화질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여기에서 낙오된 사업자는 바로 퇴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는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오래 전 경험하였던 이동전화시장에서의 사례를 보면서 디지털방송의 미래를 예상해보면 좀 더 쉽게 이해될 것이다. 독점적 사업자였던 한국이동통신(현, SKT)이 아날로그방식으로 이동전화를 제공하였는데 가입자가 늘어나면서 통화품질이 열악해졌지만 이를 해결할 디지털화 도입에는 수동적 태도를 보였었다. 그러다가 신세기통신이 진입해서 디지털방식으로 가입자를 유혹하려하자 한국이동통신은 사력을 다해 디지털화를 추진하였고, 신세기통신 서비스 개시보다 조금 빨리 디지털화를 완성하였다. 물론 국민은 지긋지긋한 통화적체로부터 해방되었고, 다양한 부가서비스도 향유하게 되었다. 방송도 어느 전송망이 먼저 디지털화를 이룰지 몰라도 이 경쟁에서 뒤쳐진 자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정부도 디지털화를 조기에 이루기 위해 방송 전송망간 경쟁을 도입하는 ‘정책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이다. 디지털방송이 차세대 우리나라의 성장산업으로써 국가의 경제를 책임진다면 전송망 경쟁도입의 중요성은 더욱 크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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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무역학 학사
프랑스 파리 1대학 경제학 석사
프랑스 파리 1대학 경제학 박사
정보통신정책연구원 통신방송연구실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