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멕시코 캔쿤에서 개최된 제5차 WTO 각료회의가 별다른 성과 없이 폐막되었다. 농산물 보조금, 투자 및 경쟁정책에 대한 North-South 대립구도가 실패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협상 실패에 대한 세간의 반응은 크게 실패를 반기는 그룹과 실패를 우려하는 그룹으로 구분되는 것 같다. 전자는 대개 시장개방의 부정적인 측면을 주로 보는 분들이며, 후자는 시장개방의 긍정적인 측면을 주로 보는 분들이다. 경쟁을 최선의 결과에 근접하기 위한 도구로 이해한다면, 시장개방은 경쟁의 지리적 범위를 국외의 경제주체까지로 확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효율성 관점에서 시장개방을 반대할 유인은 크지 않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경제적 혜택을 강조하는 선진국들조차 정치적으로 복잡한 자국 내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시장개방에 대한 입장을 결정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필자의 입장은 무엇일까? 의외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 필자는 내심 실패를 반기는 그룹에 속한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경제학적 효율성이라는 잣대에 의한 것이 아니다. 협상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으로서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해에 기초한다. 좀더 나아간다면 협상업무의 위상과 관련한 걱정스러운 우리 현실에 대한 노파심의 표현이다. 전형적 정부 고유기능인 통상협상은 국제업무만을 주로 담당하는 부처나 기관이 아니라면 거의 예외 없이 업무의 우선순위 상 국내업무의 뒷전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통상현안이 부각되는 경우에 한해 일시적으로 담당부서나 관련자들에게 충분하지 않은 관심이라도 가능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캔쿤 각료회의 실패를 반기는 이유는 당분간 이러한 관심의 언저리에라도 머무를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다.
국제업무 담당자들이 흔히 겪는 의전출장과 관련하여 사석에서 '칭찬도 꾸지람도 없는 의전출장이면 성공작'이라는 얘기를 듣곤 한다. 의전출장에서는 실수하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하며, 단 한차례의 실수가 모든 공을 허사로 만들 수 있다는 위험부담 측면을 강조하는 말이다. IT분야 통상협상 업무에 지난 8년여 간 관여하면서 필자가 느낀 소감도 의전출장에 대한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필자만의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정부의 국제업무 담당자들 일부는 본인들의 재임기간 중 통상문제가 현안으로 부각되지 않기를 바라거나 짐짓 피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자주 갖게 된다. 좀더 심하게는 의전출장을 좀더 중시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현실은 협상업무 자체가 담당자 개인에게 주는 다양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다른 국제업무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제도적 인센티브가 결여된 상황에서 당연할 수밖에 없는 개인적 차원의 반응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계절성(Seasonality) 및 개인적 위험부담, 여타 국제업무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한된 과시효과 등 협상업무 특유의 속성으로 인한 일부의 자발적, 비자발적 경시풍조에도 불구하고, 정부 본연의 고유기능으로서 협상업무의 중요성과 책임이 무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글로벌화의 추세 속에서 경제활동은 물론이고 국제무역게임의 법칙이라는 측면에서도 국가라는 경계는 급속하게 허물어지고 있으며, 시장자유화 추세 속에서 전통적으로 정부규제 하에 머물러 있던 민간주체들의 목소리는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 규정이나 정책을 국제기준에 맞추어야 할 법적 의무준수의 범위는 넓어지고 있으며, 민간주체들의 경제적 이익과 상충하는 통상규범이나 교역장벽을 해소해야 할 정부의 부담과 의무는 증대되고 있다. 해외시장진출과 외자유치가 특히 화두가 되고 있는 IT분야에서는 민간주체들의 경제적 욕구를 좀더 실용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한 정책도구로서 협상업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일부 담당자들이 협상업무를 의전출장과 유사한 차원에서 또는 그이하로 판단한다면, 이는 정부의 고유기능에 대한 일종의 도덕적 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나라 IT시장의 발전은 민간과 정부 공동노력의 산물이며, 국내 규제개혁과 대외 통상협상의 조화를 통해 빚어낸 합작품이다. 특히 1980년대 말까지도 통신개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던 상황에서 밤잠을 설치며 외부적 개방압력에 슬기롭게 대응한 전임 협상업무 담당자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협상진행 중 과중한 업무부담으로 인해 고귀한 생명을 잃고 우리의 기억에만 남아있는 분도 있다. 이런 전임자들의 노고를 헛되이 하지 않고, 후임자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그 누구든 우선 개인적 차원에서 협상업무 담당자로서의 사명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제도적인 여건이 마련되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에게만 모든 것을 맡기고 책임지도록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도덕적 해이이다. 협상업무 담당자 개인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이 단절되어 있는 한, 대과 없이 주어진 일만 대충 처리하다가 다른 부서로 신속히 옮겨가는 소위 '먹튀(먹고 튄다)' 현상의 만연을 피할 길이 없다. 협상업무에 대한 노하우는 시간을 요하고, 담당자 개인에게 체화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는 점에서 전문성과 협상력 증진을 위해 정부 내의 제도적 개선이 시급하다.
----------* 약력*----------------------------
+ 서울대학교 국제경제학과 학사 전공 : (국제경제학)
+ 서울대학교 국제경제학과 석사 전공 : (국제무역론)
+ Duke University 경제학과 박사 전공 : (국제무역론)
+ 정보통신부 협상자문관
+ 한.미 기술표준(WIPI)협상 참가 정부대표
+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 DDA 민관합동포럼 서비스분과위 분과위원
+ WTO/TBT 위원회참가 정부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