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심심한 걸 못 견딘다. 집에서나 길에서나 가만히 있는 걸 제일 싫어한다. 사람들은 사색을 하라고 하지만, 나는 사색을 하더라도 뭘 하면서 해야지 그냥 사색을 하진 못한다. 나는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의 원형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자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꼭 그들을 깨워 무언가를 하고 놀아야 했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 데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가. 자는 건 정말 아까운 일이고 더 아까운 건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일이다.
일이 바빠지게 되면서 출퇴근 시간이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 하루에 2시간이면, 1년에 약 500시간이 된다. 이 시간을 어떻게 즐겁게 지내느냐가 나의 항시적인 관심사이다. 음악을 듣기도 하고, 책을 보기도 하고, 신문을 읽기도 한다. 그러나 신문은 펼치기도 힘들고, 책은 잘 집중이 안 되고, 음악은 원래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나는 항상 꿈꾸어 왔다.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비행기에서 조그마한 단말기로 내가 좋아하는 영화, 드라마, 스포츠경기를 맘대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과연 그런 세상이 올까? 부산 ITU에 가보니 모든 휴대폰들이 동영상 재생을 최우선 광고로 내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회의적이었다. 과연 저렇게 조그마한 화면으로 뭘 볼 수 있지? 맨날 오락가락 하는 정책들이 제대로 결정이나 나야 볼 거 아냐? 콘텐츠도 무지 비싸다던데? 뭔가 다른 게 없을까? 조그마한 노트북 컴퓨터? 그래도 무겁던데...지하철에서 서서 보긴 무리지..PDA? 용량이 작다던데....컴퓨터파일하고 호환도 잘 안된다던데...
이런 고민을 안고 있던 나는 우연히 내가 잘 가는 인터넷 동영상 커뮤니티에서 PMP(portable media player)라는 제품이 올 가을부터 출시가 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우리나라 굴지의 회사들이 차례로 이 사업에 나서고 있다고 하니 더욱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번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전자전에 가서 이 제품들을 모두 보고 왔다. ‘바로 이거였다!’. ‘어떻게 내가 원하고 있던 걸 그대로 만들어 줄 수가 있지?’ 정말 신기했다. 인간의 욕망을 이렇게 기술이 만족을 시켜줄 수가 있다니. PMP는 책 절반 정도의 크기로 되어 있었고, 3.5인치 화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컴퓨터 안에 있는 동영상 파일들을 모두 USB를 이용해 옮긴 후, 그대로 재생이 가능했다. 전자전을 다녀온 나는 바로 다음날 이 상품을 예약주문하였다. 이 상품만 도착하면, 출퇴근 시간의 무료함은 이제 끝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비쿼터스를 얘기하고 있다. 과거 포스트모더니즘 정도는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를 베끼는 점에서, 쉬운 개념을 어렵게 설명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많이 유사한 것 같다. 유비쿼터스와 관련해서는 밖에 나가서도 집의 가스렌지를 조절할 수 있는 홈네트워킹, 어디서나 도로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텔레매틱스 등이 주요 기술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유비쿼터스화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일하게 해주는’ 기술이 아니라 ‘놀게 해주는’ 기술이다. 이러한 ‘노는’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기술이 향후 유비쿼터스화를 선도해나갈 것이다. 과거 워커맨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그 성공을 설명할 수 있으며, mp3 플레이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젠 영상의 시대이다. 단지 음악만을 듣는 것으로는 이제 부족하다. 듣고 보아야 한다. 이제 길거리 곳곳에서 개개인의 pmp를 통해 영화가 수 천편 동시 상영되는 날이 도래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영화는 극장에서, 드라마는 안방에서 봐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노는 것에는 MUST란 없다. 내가 좋은 데로 놀면 되는 거니까. 며칠 후면 PMP가 도착한다. 도착하면 립핑을 해놓은 영화 ‘Once upon a time in America’를 다시 보려고 한다. 나는 늦가을이 되면 언제나 이 영화가 보고 싶어진다. 지하철까지 와서 꼭 영화를 봐야겠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전혀. 왜냐하면 나는 어디서나 놀고 싶으니까.
-- * 약 력 * -----------------------------------------------
+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학사
+ 프랑스 파리5대학 사회학부 석사
+ 프랑스 파리 5대학 사회학부 박사
+ 디지털미래연구실 연구책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