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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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여행

  • 작성자김현식  연구원
  • 소속미래한국연구실
  • 등록일 2004.10.12

 

오후 나는 두 명의 친구와 과거를 향한 여행을 하고 있었다. 좌석버스의 조그마한 공간에 기대어 전날 들이켰던 알콜의 여독을 풀려는 수면욕구가 조금 채워지면서 저절로 떠진 눈이 무료한 차창의 풍경을 외면했을 때 우리는 10년 전의 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10년,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13년 전이다. 얼굴과 성격, 수업방식 그 모든 것이 궁금해서 교실 밖으로 나가 마중까지 하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의 첫인상은 젊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첫인상이 바뀌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앞으로 여러분들에게 국민윤리를 가르칠 ***입니다”정도의 멘트였을 것이다. 하지만 피아노 맨 왼쪽의 건반을 두드리는 듯한 저음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던 친구는 교탁 바로 맨 앞에 앉은 한 두 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무엇인가 소리가 난 것 같긴 한데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곧 많은 학생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몇몇 짓궂은 아이들은 첫 수업이 끝나지 마자 선생님의 목소리를 자신들의 개인기로 삼았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전화에서 울려 나오는 저음의 목소리는 반갑기도 했지만 10년 전의 추억이 오늘의 모습으로 변질되지나 않을까하는 우려가 조금씩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는 10대 후반이었고 선생님은 20대 후반이었다. 이제 우리는 20대 후반이고 선생님은 30대 후반이다. 당시의 선생님은 오늘의 우리보다 어렸고 오늘의 우리는 당시의 선생님보다 많은 경험과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나이만 많을 뿐 세상을 보는 눈은 더 편협하고 그 깊이는 얕으며 느낌은 풍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오늘의 방문을 주도했던 녀석은 선생님께서 대안학교에 다니신다고 했다. 대안학교라.... 대학교 학부과정을 졸업하면서 한동안 잊혀졌던 이름이다. 대학의 한 교양과목에서 접했던 생태학교는 어려움 그 자체였다. 사회적 인식이 낮아 아무도 자신의 자녀를 보내려고 하지 않고 정부에서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들어 뒷받침을 해주지 않으며 교육계에서는 이단아로 몰려 뜻있는 사람들의 강인한 의지 하나만으로 꾸려가야만 하는 학교. 하지만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같이 설립했던 사람들의 서로 다른 진리주장에 의해 종종 학교의 폐쇄가 결정되던 곳. 그런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대안학교에 대한 인상이었다. 그런 곳에 있는 선생님? 참 대단하신 분이다. 그것이 내가 내린 선생님의 의지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다.

코란도를 타고 오신 선생님은 예전과 다름이 없으셨다. 작달막한 체구에 낮은 저음. 다만 덥수룩하게 기르신 수염만이 달라진 점이었다. 길이 그렇게 매끄럽게 포장되어 있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다니는 길이 좁아 조금만 실수하면 황금빛 논두렁으로 곤두박질 칠 것만 같았지만 선생님은 여유롭게 운전대를 돌리셨다. 어찌나 많은 갈림길을 돌았던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기 시작할 무렵 선생님은 차를 멈추고 시동을 끄셨다. 그리 크지 않은 마당이 있는 1층 집이었다. 70년대에 지었을 법한 건물이었는데 황토벽에 슬레이트지붕을 하고 있었다. 오른 편으로는 장독대가 있었고 그 옆에는 개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아름드리 나무 2그루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본채 오른쪽으로는 예전에 외양간으로 쓰였을 법한 건물이 놓여 있었고 아담한 마당에는 두개의 식탁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으며 작은 나무가 그 위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배가 불룩한 사모님은 임신8개월이라고 하셨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계신 사모님은 웃음에서 묻어나오는 부드러움 속의 강인함과 강직함을 숨기지 않으셨다. 목소리를 제외하곤 모든 면에서 아버지를 빼어 닮은 두 아이는 모두 안경을 쓰고 있었고 초등학교 3학년과 5학년에 다닌다고 했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분교에 다닌다는 그 아이들은 자연이 인간에게 베풀어주는 투박함과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서양철학에 대한 수업을 시작했을 때 선생님은 브로디의 “철학과의 만남”이라는 책을 추천해 주시면서 고등학교 시절에는 꼭 읽어보아야 할 글이라고 하셨다. 그날 저녁 난 서점에 들러 그 책을 샀고 입시공부에 찌든 어느 날 첫 장을 넘겨보았다. 하지만 그걸 이해하기에 난 무척이나 어렸던 것 같다. 책장 속에서 먼지만 쌓여갔고 대학진학이 결정나면서 남는 시간에 읽어볼 거리를 찾던 나는 그 책을 다시 펴 보았지만 여전히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건 내가 제대를 하고 나서 읽어보려고 했을 때도, 복학을 한 후 철학수업을 들으면서 시도해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철학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쓰기에 어렵기 때문이고 그것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들어가는 추상성이 어렵고 유연한 사고를 하지 못하고 굳어져 버린 내 두뇌 때문이라는 점을 이해하지만 읽으려고 시도하던 때마다 느꼈던 벽은 당신이 고등학교 시절 가지고 있던 교육에 대한 상을 느끼게 해준다. 그렇게 그 책을 읽으려고 시도했을 때마다 선생님이 지니고 있는 아우라(aura)를 느꼈고 그런 방식으로 나는 칸트의 순수함을, 쇼펜하우어의 고독을 그리고 롤즈의 정의를 선생님에게서 배웠다.

입시지옥의 치열함을 더해가던 고등학교시절 선생님은 그야말로 외로운 섬이셨다.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욕구가 중요한 것이며 우리들이 하고자 하는 바를 그리고 그 책임을 강조하셨던 선생님은 우리들의 우상이었다. 선생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한마디의 말은 “니들 꼴리는 대로 해라”였다. 다른 사람이 시키는 것을 강요받아 마지못해서 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원하는 만큼 하거라. 그것이 선생님의 가르침이셨다. 그래서 그랬던지 선생님은 모든 학생들에게서 가장 좋은 선생님으로 생각되었다. 2학년이 될 무렵 선생님이 한 반의 담임을 맡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모든 학생들이 그 반에 가고자 했으며 그 꿈을 이루지 못한 학생들은 부러움의 눈길을 보냈다. 그런 탓이었을까. 3학년이 되었을 때에 선생님은 입시기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와 같이 올라오지 못하고, 계속해서 3학년을 맡으며 ‘비윤리’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던 윤리 선생님으로 대체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선생님은 그 해를 보내고 학교를 떠났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입시에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중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고 하신다.

선생님은 철학과 동양고전을 가르치는 대안학교에 재직 중이시다. 올해 초에 설립된 곳이라고 하는데 몇몇 뜻있는 분들이 교육의 미래를 생각하며 초석을 다지는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전교생이 23명밖에 되지 않지만 이 아이들이 잘 자라서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 간다면 23명의 역할만이 아니라 2300명, 2억3천 만 명의 그릇이 되기를 바라며 아이들을 가르치신다. 그리고 사회가 만들어낸 욕구가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욕구를, 사회가 가지라고 하는 꿈이 아니라 스스로에게서 우러나오는 꿈을, 사회가 만들어낸 상상력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저편에서 묻어나오는 상상력을 키워나갈 것을 가르치신다고 했다.

아마도 처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을 우리는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고등학교에서 전인교육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은 여전히 전인교육을 하시며 자신이 처음으로 가르쳤던 아이들을 기억하고 계셨고, 전인교육을 잊어버린 나이가 되어버린 우리는 전인교육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선생님을 기억한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상이 잡혀가던 고등학교 시절을 같이 보냈던 선생님을 기억하게 될 것이고, 선생님은 교육의 첫걸음을 디뎠던 시절을 우리와 함께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 나 자신을 찾아 떠났던 여행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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