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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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 끊임없는 사유

  • 작성자이상규  책임연구원
  • 소속공정경쟁연구실
  • 등록일 2004.11.15



“불교의 선문답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自省을 통한 절대 진리의 추구, 즉 깨달음의 터득에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대승불교의 목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중생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나에게는 요원하게만 느껴진다. 하여간 나의 단견으로는 선문답은 자성의 한 수단으로 五正을 자극하는 방편으로 느껴진다.

책에서 읽었는지, 드라마에서 보았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런 대사가 생각난다. “스님 마음의 평화를 얻는 방법이 무엇일까요?”라는 중생의 질문에 “오뉴월 절 마당에 삽살개가 놀고 있구나.”라는 스님의 선답은 나에게는 그야말로 동문서답의 대표적 예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답을 얻은 중생은 끊임없는 사유 - 불가에서 말하는 正念을 통해 -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을 얻게 된다.

끊임없는 사유는 비록 불가의 득도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리라. 내가 배운 경제학에도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경제학, 특히 근대경제학은 “사회과학의 왕”(King of Social Sciences)라고 칭하면서 수학, 논리학을 활용하여 과학화를 추구해 왔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경제학은 보다 정치화 되었지만, 반면 현실에서 괴리된 감도 없지 않다.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모형이 때로는 현실을 지나치게 추상화·단순화한 것이거나, 사용하는 가정들이 다소 비현실적인 경우도 있다. “모든 경제주체는 자신의 선호체계를 알고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가정은 경제학의 가장 근본적 가정이지만, 현실에서 자신의 선호체계를 완벽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경제학은 동일한 현상에 대하여 서로 상반된 결론을 도출하기도 한다. 거시경제학에서 케인즈학파와 신고전학파의 논쟁이나, 법경제학에서 시카고학파와 하버드학파의 논쟁은 그와 같은 예이다.

이처럼 거창하지는 않지만 나의 경우에도 경제학만으로는 명확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두개의 논리적 경제학 모형에서 서로 다른 결론이 도출될 경우 어떤 결론을 택해야할까? 사용한 가정이 보다 현실적인 모형이 어느 것인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원칙(principle)을 충족시키는 것은 어느 것인가,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가, 공정한 것을 말하는 걸까? 공정한 것은 무엇일까, 모든 사람들이 상대방이 가진 것, 상대방이 처한 환경 등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의 시작이며, 끊임없는 사유가 필요한 경우이다. 경제학은 선택(choice) 또는 결정(decision)에 대해 공부하는 학문이기는 하나, 이 경우는 경제학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인 것 같다. 결국 좋은 선택과 결정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이 필요한 것 같다.

벌써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올해도 좋은 결실을 맺기 위해, 또 발전할 수 있는 내년이 되기 위해 面書修道와 선문답이 필요할 것 같다.

P.S.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처럼 자신의 존재 근거를 사고·사유를 통해 확인하고자 한 소크라테스와 선문답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자한 불가. 전자는 사유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후자는 사유를 통해 자신을 벗어나는 어찌 보면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데 양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 * 약 력 * -----------------------------------------------

+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학사
+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석사
+ University of Rochester (USA) 경제학과 박사
+ 정보통신정책연구원 공정경쟁연구실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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