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이라는 용어는 토마스 쿤이 1962년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에서 처음 언급한 이후 일반화되어 많은 사람들에 의해 활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패러다임은 일정한 분야에 대해 한 시대에서 정상적이라고 인정되는 규범, 체계 등을 의미하는데 하나의 패러다임은 일정기간 지속되다가 혁명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으로 쇠퇴하면서 대체 된다. 과학의 발전사를 놓고 볼 때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은 이름 없는 과학자에 의해 미미하게 시작되고 기존 패러다임에 속한 유명한 과학자들-이들도 젊은 시절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시했던 선구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의 격렬한 저항을 맞게 된다. 멀게는 ‘학문의 신(神)’이라 일컬어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을 뒤집은 갈릴레이 갈릴레오에서부터, 가깝게는 20세기 들어 태양이 수소로 구성되어 있고 핵융합을 통해 연소되고 있는 것을 밝혀 우주의 탄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세실리아 페인(페인은 지도교수로부터도 외면 받아 졸업을 못할 뻔 했고 논문에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부정하는 문구를 삽입한 이후에야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다)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시자는 기존 패러다임에 길들여진 기득권자들로부터 상당한 공격을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21세기인 현재에도 과학계의 어디에선가는 이러한 일이 반복되고 있을 것이다.
비단 과학계뿐만 아니라 우리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이동통신 산업에도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가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동통신은 유선통신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장치산업 또는 설비 산업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동통신사업자는 정부로부터 필수 자원인 주파수를 할당받아 상당한 규모의 투자비를 들여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이를 기반으로 가입자를 확보하여 사업을 영위하게 된다. 이동통신사업자가 투자하는 네트워크와 단말 비용은 네트워크와 단말 제조업체의 주 수입원이 되고 제조업체는 네트워크와 단말기의 발전을 이루어내 이를 채용한 서비스 사업자들이 소비자를 끌어들일 수 있도록 하는 선순환 구조를 이루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는 설비기반경쟁(facility based competition)의 정책기조를 계속 유지해왔으며 그에 따라 이동통신 서비스의 발전 및 세계 시장에서의 단말기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는 성과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이동통신의 패러다임 또는 생태계가 애플의 아이폰 등장이라는 처음에는 가벼웠던 충격에 의해 커다란 변화를 맞고 있는 것이다. 애플의 아이폰은 단순히 새로운 기능의 단말기가 등장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서비스 사업자, 단말 및 네트워크 제조업체라는 포식자의 수익모형이 가치사슬에서 변방에 떨어져 있던 애플리케이션 사업자와 OS 사업자에게로 전이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즉 포식자들의 먹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새로운 포식자가 나타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된다는 점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지난 2월 스페인에서 개최 된 MWC(Mobile World Congress) 2010은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 추세를 적극 반영하고 있다. 특히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강자로 군림하던 서비스 및 제조업체들이 자신들의 생태계에 포함되어 있지 않던 외부인의 공격에 상당한 위협을 느끼고 있으며 적극 대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스마트폰으로 대변되는 외부세력의 공격에 대한 전면 경쟁-사실은 따라잡기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의 시작을 알려주었다. 애플의 아이폰에 대응하기 위해 MS는 Window7을 탑재한 스마트폰 설명회를 개최하였으며, 소니-에릭슨은 구글 안드로이드 기반의 Xperia X10을 출시하였다.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임한 업체는 우리나라의 삼성전자와 중국의 화웨이(Huawei)라고 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메인 전시관에서 가장 큰 전시부스를 차지하였는데 특히 자체개발한 ‘바다 OS/플랫폼’을 탑재하고 AMOLED의 선명한 디스플레이 기능을 보유한 WAVE 폰을 처음으로 선보여 아이폰에 대해 고기능화로 경쟁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화웨이는 저가의 풍부한 중국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단기간 내에 이동통신네트워크 세계시장의 2위에 오른 업체답게 스마트 폰 분야에서도 저가형, 보급형 모델을 중심으로 개발하여 아이폰과 동일한 성능을 갖는 150달러의 스마트폰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타 단말 제조업체들도 다양한 스마트폰을 출시하여 국제적인 대규모 전시회에서 볼만한 것이 스마트폰 밖에 없다는 자조 섞인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개인적으로는 소니가 출시한 눈동자 움직임으로 조종하는 이어폰이 참신하였지만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또한 기존 생태계 내에서 기득권을 보유하고 있는 서비스 사업자와 제조업체의 협력체계 강화, 즉 생태계 재편에 대비한 협력강화가 핵심 주제로 떠올랐다. 전시회 기간 중에 전 세계 24개의 서비스 사업자 및 단말 제조업체가 초대형 앱스토어인 WAC(Wholesale App Community)를 창설하는데 합의했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이는 외부인이 아닌 기존의 핵심 서비스 사업자와 단말 제조업체간의 협력체계 강화라는 측면에서 주목을 끌었다. 기존 사업자들은 애플의 앱스토어 수익모형뿐만 아니라 구글의 광고 수익모형 또한 새로운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시회 기간 중에 이루어진 기조연설 관련 기사를 보면 보다폰 그룹의 CEO가 구글의 행태를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대해 구글의 CEO는 구글과 기존 이동통신 산업계는 가치사슬에서 공생할 수 있는 파트너임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반면 기존의 네트워크 사업자의 위기는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이동통신 서비스 사업자 입장에서는 새로운 패러다임 변화에 의해 당면한 과제가 차세대 네트워크로의 진화보다는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수익모형을 확보하는 것인데 이는 네트워크 제조업체 입장에서 진화된 네트워크를 팔기 어렵다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에 기존의 공생관계가 흔들리게 되는 것으로 네트워크 제조업체 입장에서는 서비스 사업자와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 필요한 시점임을 드러내었다. 즉 과거의 네트워크 진화에 따른 기술주도형(technology-driven)의 이동통신 산업 발전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였다.
앞으로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애플리케이션 계열의 사업자가 포식자로 자리매김할 것인지 아니면 기존의 패러다임을 유지하고 싶은 서비스 사업자 및 제조업체가 승리할 것인지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어느 정도의 변화가 발생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이루어놓은 안정적인 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플레이어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