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사무관님,
휴직 신청을 하셨다구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긴 해도 ‘그간 정말 고생 많으셨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쉬시는 건 솔직히 부럽기도 하구요.
제가 사무관님을 처음 뵈었던 건 2001년 여름이었을 겁니다. 당시 저희 KISDI와 NCA, KT, KISTI 등 여러 기관의 실무자들이 용인에 함께 모여서 ‘2001-2005 초고속정보통신망 고도화 기본계획’ 을 작성했었지요. 그 때 사무관님은 정통부에 갓 부임했던 때였고 그래서 통신망에 대한 지식도 많지 않으셨지요. 가령 OSI(Open System Interconnection) 7계층에서 Layer 2(Data Link Layer)와 Layer 3(Network Layer)가 무슨 뜻이고 어떻게 다르냐고 물어보시기도 했죠. 그러던 ㅇ사무관님이 이젠 주저함 없이 정책 관련 지침을 내리시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저는 ㅇ사무관님에게서 많이 배웠습니다. 다른 것도 많지만 특히 업무를 대하는 태도면에서 많은 걸 느꼈습니다. 지극히 작은 일까지 놓치지 않는 섬세함, 때로는 집요함, 그리고 맡은 일은 꼭 완결 짓는 책임감 등은 제가 사무관님과 같이 일하면서 피부로 느꼈던 점들입니다. 사람들은 복지부동 운운하면서 공무원들을 욕하는 경우가 많지만, 적어도 제가 겪어 본 공무원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사무관님과 저의 업무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트랜스유라시아네트워크(Trans-Eurasia Information Network, TEIN)이지요. 저는 TEIN을 생각하면 항상 국제관계학에서 말하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간의 갈등을 떠올리게 됩니다. Woodrow Wilson 같은 이상주의자들은 국경을 초월하는 사람들간의 접촉, 공개 외교 등을 통해 국제협력과 상호원조가 가능하고 궁극적으로는 세계 평화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지요. 반면 Hans Morgenthau 같은 현실주의자들은 국가의 속성이 인간의 자기중심적, 즉 이기적인 본성으로부터 기인하여 개별 국가는 자기의 이익을 전체의 선(善)보다 우선시 한다는걸 강조합니다. 저는 TEIN이 바로 이 두 영역의 중간에 끼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TEIN의 꿈과 이상은 너무나 크고도 높습니다. TEIN은 유럽과 아시아라는 두 지역의 공동 번영을 지향합니다. 대한민국이라는 1개 국가와 유럽의 특정 1개 국가간의 협력도 고된 일인데, TEIN은 ASEM의 유럽 15개 국가와 아시아 10개국간의 협력을 도모합니다. 김대중 전(前) 대통령께서 유럽의회에서 연설하셨듯이 TEIN은 아시아와 유럽을 하나로 잇는 디지털 실크로드가 되고자 하는 것이지요. 이상주의자 진영에서 보면 이것은 매우 바람직하고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할 뿐이지요. TEIN의 원대한 목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주요 당사국마저도 자기 이익을 희생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비용 분담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은 제법 있었지만 실질적인 행동은 전무하지 않았습니까? 또 일본은 아시아의 연구망 허브(hub) 역할을 더욱 고수하고 강화하기 위해 투자를 대폭 늘리고 있습니다. 현실주의자들은 그것 보라는 식으로 통쾌해할 것입니다. 애초에 TEIN의 목표 설정이 비현실적이었고 방법론마저도 이상에 머물고 있으니 실패할 게 뻔하다고 조롱할 것입니다.
이처럼 TEIN은 적어도 국제관계의 면에서는 본질적인 갈등 요인을 이미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업무 현장에서는 애로 사항도 많고 힘도 듭니다. 하지만 동시에 TEIN의 진가는 이상과 현실, 이 양자를 모두 겸비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도 할 것입니다.
ASEM의 정상들은 TEIN의 취지에 합의했기 때문에 TEIN을 ASEM의 공식 프로젝트로 승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2001년 한 해 내내 저희 KISDI와 프랑스 RENATER가 공동으로 노력한 결과 TEIN 망을 개통했지요. 이미 IPv6나 사이버 박물관, Grid 등의 연구 프로젝트들은 TEIN 망을 이용해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성격 면에서 보면 TEIN은 아시아와 북미간 TransPAC이나 북미와 유럽간 Euro-Link와 같이 차세대 연구망의 성격을 공유하지만, 동시에 그런 사례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개도국과의 협력, 즉 정보격차 해소에 또한 기여합니다. 말레이시아를 중심으로 한 ASEAN과의 연결이 바로 그런 목적이지요. 비용 분담 문제도 꼭 비관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프랑스는 애초에 비용 분담을 약조했던 1차년도의 기간이 다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TEIN 프로젝트에 예산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또 올해 5월 주(駐)말레이시아 EC 대사는 유럽이 향후 3년간 일정 부분 돈을 내겠노라고 공언을 하기도 했지요.
저는 TEIN이 매우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국제 프로젝트일 뿐만 아니라 유사한 사례가 없는 실로 독창적인 프로젝트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힘이 들면서도 계속 애정이 갑니다. 일의 진척이 느릴지라도 이상은 높고,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 당초 정해진 답은 없었지만 현실적인 방안이 조금씩 구체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ㅇ사무관님, 제 인생에서 지난 약 2년은 사무관님과의 2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말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면서 인간적인 이해와 신뢰도 많이 깊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후임으로 어떤 분이 오시더라도 저는 열심히 하겠습니다.
가끔씩 들르시죠. 저희 연구원은 환경이 꽤 좋잖아요. 녹지가 많아서 공기도 좋고, 밥 맛있게 하는 식당도 여럿 있습니다. 휴직 생활이 어떠신지 듣고 싶기도 하구요.
2003. 8. 9.
KISDI 국제연구협력단 APII 협력센터
주임연구원 나항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