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 80년대를 회상하면서, ‘암울한 시국, 장발머리, 조용필(몇몇에게는 들국화)’이라는 농담을 던지던 것이 생각난다. 먼 훗날 내가 2000~2010년을 회상하게 된다면 어떤 단어가 나를 지배하게 될 것인가.
성급하게 2000년대의 의미를 곱씹어 보자. 21세기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 내 이십대의 마지막과 삼십세라는 새로운 분기점을 제공한 시기라는 점. 오호라...삼십세... 갑자기 숫자의 무게에 숙연해지기만 한다. 누군가 말하는 꺾어진 육십이라는 나이가 바로 이것이더냐 하는..과연 이립을 맞이하는 나는 어떠한 인생의 패러다임을 가진 인간이더냐...하는 생각이 앞선다. 글쎄, 나의 삼십세를 맞는 가장 큰 패러다임은 나의 사회적 자아를 규정한 ‘KISDI,’와 내면의 자아를 형성하게 끔 해준 책, ‘나는 달린다’로 압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공통점이 얼핏 떠오르지 않는 이 둘 단어 사이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인프라를 제공한 실체와 그 이론적 근거라는 연관관계가 있다.
요쉬카 피셔가 본인의 책에서 문제에 대한 압박감을 달리기로 승화시키고자 뛰던 것처럼, 나의 마지막 이십대의 과제는 ‘내면으로의 몰두’라는 명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속에 나의 몸과 마음은 지하1층 헬스실로 향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내 앞의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나와 타협하기 싫다는 단조로움에 대한 일탈이었으리라.
나의 달리기를 머리 속에서 떠올려 본다. 어두운 방에 불을 켜고 트레드 밀 위에 올라서는 순간, 약간 두려워진다. 두려움은 사람을 조금 비겁하게 만드는 지 오늘은 어제보다 관절이 그다지 좋지 못하니 적당히 타협할까?. 혹시나 후유증으로 몸살이나 앓을지 모르니 내일을 생각해서 좀 페이스를 줄여볼까?... 에잇 모르겠다. 그냥 뛰는 거야. 스타트 버튼을 누르는 순간, 나는 거침없이 달린다. 목이 탄다. 숨이 가쁘다. 가끔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눈물이 나기도 한다. 지난날의 그곳들이 아른거리며 그냥 멈춰버리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럴땐 얍하고 기합을 질러야지. 다시 뛰는거야. 터덕터덕..헉헉헉 조금만 힘을 내자...드디어 숨이 턱하고 막힌다. 멈추자. 심호흡을 하며 땀방울을 닦아 낸다. 이야 나는 해내고야 말았다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즐겁다. 단순하지만 내 하루에 가장 짜릿한 순간이다.
어쩌면 달리기는 인생의 경로와 비슷할 것이다. 인생이 철저히 혼자 스스로 풀어가야 할 과제인 것처럼, 달리는 과정에서는 나는 항상 스스로와 약속하는 유일한 존재가 되버린다. 인생이 끊임없는 나 자신과의 대화이듯 달리기도 매 순간 내면의 대화를 하는 시간이다.
달리기라는 내면의 대화를 통해 내가 얻은 화두는 과연 무엇인가? 선택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저 몰두하라는 것. 내일의 후유증을 걱정하며 움츠려드는 것은 건강한 신체를 가져다주지 않는 것처럼, 인생의 전환점에서 선택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순간 과연 나는 이런 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의문 속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달리는 순간 한없이 몰두하지 않고서는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이 선택한 인생의 경로를 자꾸 되돌리려 한다면 삶이 점점 나약해진다는 것. 결국 선택에 변함없이 충실하며 몰두하라는 것. 어쨌든 완성되는 그 순간에는 꼴찌라도 박수를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
이제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내 앞에 펼쳐질 삶의 여정 속에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될까. 한결같이 그 시작과 선택에서 두려움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결정을 끝내고 나의 선택에 변함없이 몰두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생각을 뒤로 하고 오늘도 나는 뛴다. 포레스트 검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