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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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

  • 작성자박용우  주임연구원
  • 소속신성장산업연구실
  • 등록일 2004.12.13

내가 추억하는 과거의 기억 중 '평가'로 인해 곤혹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학문에 뜻이 있었는지 군대 때문이었는지 결론내릴 수 없지만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으로 진학한 그해 가을에 출신학부로 '강의'라는 외도를 나갔다. 관계가 돈독했던 교수님의 배려도 있었고, 나역시 애매한 내 정체성에 뜻을 심어줄 수 있다는 기대로 한 학기를 준비했었다.

 

그런데 맡은 과목이 고학년 과목이었고 군대를 가지 않고 박사로 진학한 터라 이제 막 복학한 동기 및 선배들이 내 강의에 들어오는 상황이 되었다. 선택도 아닌 필수과목이었으니 그들 또한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었을 테다. 시간이 어찌 어찌 흘러 지나갔지만 중간고사가 끝난 후 그간의 빈번한 퀴즈와 출결상황, 수업태도, 발표 등을 종합하여 그네들을 평가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닥쳤다.

 

강의안을 만들고, 수업준비를 했던 그전 시간보다 더 맘고생과 갈등을 겪었던 시기가 바로 그 평가를 수행했던 1주일간 이었었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다양한 검증방법과 지표들을 나름대로 개발하고, 그렇게 측정된 지표를 계량화해서 엑셀로 돌려 뽑은 정량적 결과와 수업에 임하는 태도와 참신한 사고과정, 과목에 대한 열정과 같은 정성적 데이터 사이에서 쉽사리 결론내릴 수 없는 애매한 상황에 장고만 거듭했다. 게다가 ‘동기'란 이름의 동질감과 ‘선배'란 이름의 눈치도 배제할 수 없는 외생요소였다. 하물며 같은 동네사는 ‘후배'와의 빈번한 하교길은 왜 그리 부담스럽게 느껴지던지....

 

결국 시간은 흘러갔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난 좋은 평가자가 되지 못했던 것 같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을 평가의 원칙을 만든다는 계획이 결국 모든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는 함정으로 빠지게 만들었고, 게다가 평가결과를 설득시켜야 한다는 조급함이 모두가 조금씩은  불만을 갖는 평가로 변질되어 버렸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처한 여러 제약요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위안할 수 있겠지만...당시 나에게 부족했던 것은 평가를 통해 달성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없었다는 점일 게다.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고려가 부족한 상황에서 절차적 정당성만 추구하다 보니 나타난 당연한 결과라 보인다.

 

요즘은 내가 피 평가자의 신분이며, 학교의 성적과 같이 S에서 D에 이르기까지 정규분포가정에 따라 나도 어딘가에 속해야 하는 처지다. 오늘 하루 지난 6개월간 활동을 정리하고, 주어진 양식에 맞추어 자료를 제출했다. 조만간 수평평가와 상향평가까지 보너스로 하다보면 나를 포함한 연구원의 모든 사람들의 결과가 분포의 점들로 표시될 터이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당시 평가자의 위치에서 고민했던 것 중 하나가 내가 가지고 있는 피 평가자의 데이터를 얼마나 신뢰 할 수 있느냐의 딜레마 였는데, 처지가 바뀐 지금 그 데이터를 제출하는 입장으로 바뀌고 나니 몇가지 유혹에 봉착한다. 조금 더 포장할 수 있을 것이고, 조금 더 평가자가 고려하는 요소에 적합한 정보들을 추가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결국 그건 다시 한번 평가자의 신분에서 범했던 오류의 반복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이 평가 라는게 대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깊은 사유가 배제된다면 지금의 칸 채우기 작업은 그저 숫자나 표식에 지나지 않음일 것이다.

 

그래서 다시 평가요소를 살펴보기로 했다. 맨 첫줄에 보이는 평가요소는 ‘이해/판단력', ‘전문지식', ‘정보수집/분석력', ‘협동심'으로 나와 있다. 지금은 퇴사한 절친한 선배연구원과 함께 '연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요구되는 기준을 나름대로 정해본적이 있다. '연구에 대한 열정', '연구에 임하는 태도', '연구를 수행하는 능력'이라고 우리 스스로 가치기준을 만들었다. 물론 우리가 으뜸으로 뽑은 것은 바로 '열정'이었다. 그런데 나를 평가하는 평가 요소 중에서는 이 열정을 계량화 할 수 있는 지표는 보이지 않는다. 그 항목이 중요하지 않아서 빠져있는 건 아닐 것이다. 결국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가장 중요한 평가의 덕목은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내 스스로를 살아있게 만드는 내부의 열정지수란 걸로 귀결된다. 내가 평가를 받아야 할 지난 몇개월간 ‘연구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과제 하나, 문제점 하나에 얼마만큼 진지했는가라는 잣대로 나를 재단 하는 것이 바로 오늘 칸 채우기를 수행하는 이유일테다.

 

오늘까지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고민하는데 있어서 내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될 것이다. 내 삶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는 잠시 멈추어 뒤돌아 봤을 때 내 자신에 대한 뿌듯함이 느껴지면 그만일 테다. 내가 정규분포의 점들의 맨 앞에 있던 맨 뒤에 있던 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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