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들에게도 운명은 정해져 있겠다. 30년 갓 넘는 기간을 살아오면서 매년 어김없이 맞닥뜨리는 만개한 꽃들을 보면서 내 맘속에, 그리고 관찰력이 뛰어난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 사람에게 인식된 꽃들의 운명이 그것을 말해준다. 사시사철 피어있는 꽃들도 있고 사람들의 관심이 멀어진 계절에 홀연히 나타나는 꽃들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관심은 대부분 새로운 시작의 설레임 탓인지 봄꽃의 향연에 집중하고 만다. 시기상으로는 지금쯤이면 다채로운 색감이 부담으로 느껴지면서 봄 잔치의 마감을 알린다. 누구도 꽃을 주제로 그 흔한 에세이도 쓰지 않고, 꽃을 주제로 한 축제도 대형놀이공원을 제외한곤 드물다. 그래서 꽃들의 운명을 이야기하기엔 지금이 제일 적합할 것 같다.
꽃을 분류해보자.
사람마다 시선의 차이가 있지만, 시선을 낮추어야 볼 수 있는 꽃, 정면 시야를 사로잡는 꽃, 시선을 들어야 볼 수 있는 꽃으로 쉽게 구분해보자.
시선을 낮춰야 볼 수 있는 꽃들은 예상외로 참 많다.
수줍은 제비꽃이 겨우 자리를 잡을만하면 들판은 이미 민들레가 점령하고 있다. 박미경 노래의 '...민들레 홀씨 되어...훨훨 날아간다'는 가사를 상기할 때마다 낮은 구릉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민들레의 군무가 상기되는 것도 이때문이다. 들판까지 갈 여가가 없는 아줌마들은 아마 구청이나 동사무소 혹은 삼각지에 색깔을 이용하여 00구청, 00시정 등의 글자를 새겨 넣은 팬지를 만날 수 있다. 난 어렸을 때부터 그 이름의 팬시함과 팬더 눈자위를 떠올리는 모양 때문에 '팬'으로 시작하는 끝말잇기라도 나올라치면 팬지가 떠오른다. 그 옆에 가녀린 데이지는 그렇게 묻혀버린 채 단막극장의 제목이나 소설 속에서나 만나고 만다.
정면 시야를 사로잡는 꽃들은 봄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이해하면 된다. 개나리부터 시작해서 애잔한 진달래가 뒤를 잇고, 사촌격인 철쭉은 기어코 이 도심을 지배한다. 개나리는 화사한 색깔과 그 늘어짐의 독특함으로 확실히 봄 마중 대표주자로 기억되지만 진달래와 철쭉은 도무지 구별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아파트를 거닐던 어느 날이다. 호기심 가득할 여자아이가 엄마손 잡고 가다 묻는다. "엄마 이게 철쭉이야?"...차라리 ‘이게 무슨 꽃이야?’라고 물었다면 진달래든 철쭉이든 하나를 이야기해도 무마가 되련만 호기심 많고 영리한 아이는 객관식 세대의 엄마를 배려하듯 둘 중 하나를 택하란다. 머뭇하는 엄마의 긴장감이 느껴지고...지나치듯 '철쭉이 많이 피였네'.. 한마디 하고 지나자 몇 걸음 뒤에서 '응 그게 철쭉이야'라고 당당해진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기야 시골출신 마누라는 철도주변에 핀 건 철쭉이고, 나머진 진달래인줄 알았다고 하니 누굴 탓할 일도 아닐테다. 철쭉과 사촌관계쯤 되는 진달래는 유명한 김소월의 시 때문인지 비장함과 진지함이 느껴진다. 우리 모두가 진달래는 민족의 꽃으로 칭송해주는데 반해, 철쭉에 대해선 영 무관심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식 인공조경으로 재단해서 도시적인 세련됨을 강조한 철쭉집단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일 수도 있다. 우린 수줍은 제비꽃, 가녀린 데이지, 애잔한 진달래를 쉽게 발견하진 못하지만 그네들이 지키고 있는 운명까지 잊고 사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 때문에 본질적인 가치를 져버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시선을 들어보자.
저산 넘어 무지개처럼 우리가 쉽게 만나지 못한 세계를 만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제일 사랑하고 아끼는 목련이 있을 테고, 4월의 교통체증을 유발하는 벚꽃이 떠오른다. 이 둘은 참 다르다. 목련은 꽃말에 얽힌 아름다운 공주의 죽음이야기에서 느껴지듯 순백색의 단아한 이미지와 함께 조용히 그 빚을 발한다. 발밑에 밟혀서야, 담장 넘어 터질 듯한 몽우리를 드리워야 인식이 된다. 큰 잎 바닥에 자신을 내려놓고서야 그 아름다움이 져버린 것에 사람들은 아쉬워한다. 목련꽃잎 떨어지기 시작하고 나서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아 목련의 자취가 감춰지는 그 짧은 생애가 아쉬움을 더욱 증폭한다. 양희은의 '하얀 목련이 필 때면...'이라는 구슬픈 노래가사에 오버랩 되어 첫사랑의 애잔함이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것도 그 순백의 순수한 시대에 대한 갈망이려니... 그래서인지 작은 꽃잎 눈 내리듯 쏟아내는 벚꽃의 물량공세가 부담스럽고, 왠지 가벼운 철부지 사랑에 대한 선입관까지 느껴져 여기저기 뉴스에 갇혀있는 벚꽃마중만 할 뿐이다. 이외에도 도심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만날 수 있는 높은 시선의 꽃들이 더욱 많다. 밤낮없이 맵싸한 향기의 수수꽃, 조팝나무가 있을테고, 복숭아꽃, 살구꽃, 꽃매화, 박태기꽃은 그 진한 색감을 유달리 강조한다. 조화로운 도심의 색감은 이렇게 우리시선에서 놓치고, 기억되지 않는 이름의 꽃들이 만들어낸다.
꽃들의 운명을 이야기하려했던 것은 식물학자도 아니고, 꽃에 대해 보통사람이상의 관심이 있지도 않은 나로서 별다른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자 함은 아니다. 이곳저곳에서 또 한해살이를 마감하는 그네들의 운명과 우리의 시선으로 규정된 선입관과 관습적 행태에 대해 다시보기를 신청하려 함이다. 꽃에 대해 문외 하던 주위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의 시선에 맞추어 가다 그간 발견하지 못했던 예쁜 꽃들에 대해 과찬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꽃 마중도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져 왔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삶이 나만의 삶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내 인생에도 봄날이 있을 테고, 그 봄날에 만개한 예쁜 꽃이 될 수도 있으련다. 그러나 철쭉처럼, 벚꽃처럼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을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목련처럼 진달래처럼 나의 운명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난 오늘도 지고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