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를 참지 못해 연일 에어컨을 틀어대고 시원함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해수욕장과 계곡을 찾아다니던, 여느 여름보다 더욱 무더웠다고 느꼈던 2005년의 여름. 100년만의 무더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와 미리 겁을 먹은 사람들에 의해 불티나게 팔리던 냉방기구, 그러나 100년만의 무더위는 없을 것이라는 정정보도와 또한 정말로 그런 것이 아니었는가 할 정도로 무더웠던 날씨에 기상청에 빗발쳤던 항의들... 이렇게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많았던 여름을 뒤로한 채 이제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 몇 번의 빗줄기가 다녀간 후 저녁공기와 새벽의 기온은 조금씩 쌀쌀해져만 가고 있다.
길거리에는 이미 긴팔을 준비하거나 걸치고 다니는 멋쟁이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휴가철을 갓 보내고 난 후임에도 불구하고 멋을 찾아 떠나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또 한 번의 일상탈출을 꿈꾸며 단풍구경 갈 계획을 짜고 있을 것이다. 예년보다 10일정도 앞당겨 진 민족 최고의 명절 추석도 가을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미 더 빨리 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참 별게 아닌 것 같으면서도 사계절을 온전히 보내야 만이 수고했다는 듯 한 살씩을 더 얹어주는 것은, 해가 바뀔 때마다 하나하나의 계절에 대해 그 감상과 느낌을 제각기 다르게 새기기를 원했던 신의 바램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해 두해 지날 때마다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른 계절들. 문득 그 차이를 깨닫게 되는 아주 작은 거리만큼이나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씩 성숙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멋진 가을날의 문턱에서, 퇴근 후 어김없이 지나치게 되는 강남의 한복판. 여느 일상과 다름없이 제각기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 사이에서 길을 걷다가 마주 오는 사람의 발걸음이 쓸쓸해 보여 그 뒤를 살며시 따라 걸어가 본다. 그러다 문득 내려다 본 내 발걸음 또한 참 쓸쓸해 보여 피식 싱거운 웃음을 짓다가, 여러 스치는 상념들과 함께 지나온 기억 속에 흐릿한 몇 번의 가을 속의 나와 앞으로 지나야 할 가을날들 속의 나를 다시금 조명해 보며 반성도 해본다.
작년 이맘때 내게 찾아온 가을의 느낌은 이러하였다. 대학원 3학기에 접어들면서 온갖 리포트와 프로젝트에 휩싸여 교정의 나뭇잎새들이 색동옷을 입어가는지, 그 잎들이 점차 한 가지 색으로 변해버려 낙엽으로 떨어져 가는지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그렇게 황량히 지나가 버렸다. 즉 무더운 여름에서 차디찬 바람의 겨울로 바로 바뀌어버린 듯하게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가을은 지나가 버렸다. 며칠 전 그렇게 두해를 보냈던 학교의 교정에서 졸업장을 손에 쥐고, 꽃다발을 한 다발 안은 채 졸업사진을 찍게 되었다. 일년 동안 머물던 학교 기숙사, 고스란히 내 꿈과 희망을 귀담아 들어주었던 기숙사 앞 아름드리 나무와 도서관 앞 돌계단을 다시금 바라보고 난 후 곧 가을을 맞이할 채비를 하는 교정의 모습들이 곳곳에서 보였고, 일년 전 같은 곳을 바라보던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곧 찬바람이 불어닥칠 것을 아직 알지 못하는 듯 한아름 나뭇잎을 감싸안고 신록의 색을 마음껏 뿜어내고 있는 울창한 나무들과, 바람과 악수하며 햇빛과 인사하는 그들을 다소곳이 바라보고 있는 교정의 벤치들... 너무나도 선명하게 또렷이 하나하나 시야에 들어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일년 후 다시 찾게 된다면 이 아름다운 교정의 풍경을 지금과 같은 감정으로 또다시 느낄 수 있을까. 학교를 거닐때와, 이제 막 학교를 떠나려 할 때, 이미 학교를 떠나 사회인이 된 지 한참후가 됐을 때의 느낌들은 이렇게 조금씩 달라지겠지. 그렇게 같은 계절과 자연이라도 이를 감상하고 숨을 들이켜 내음하는 감정들이 그만큼 나의 상황과 태도에 따라 조금씩 변해가겠지.’
다시 오지 않을 2005년의 가을. 이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날들을 아주 특별한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든다. 무엇을 계획하고, 무엇을 실천해야 내가 느낀 가을날들 중에서 가장 멋진 날들이 될는지 정해진 답은 없지만, 우선 꼼꼼히 내가 해보고 싶은 일들, 더 늦기 전에 꼭 하지 않으면 안될 일들을 생각나는 대로 10가지만 수첩에 적어보기로 하였다. 그 중 첫 번째를 어제 행동으로 옮겼다. 늘 미루기만 했던, 그 중요성을 알면서도 쉽게 실천되지 않던 운동을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헬스장을 조심스럽게 찾아간 것이다.
이렇게 자그마한 일부터 실천에 옮기면서, 얼마 남지 않은 20대의 값진 나날들을 위해 소중한 한 가지씩 잃지 않고 부여잡고 있다보면, 내가 느끼고 싶은 멋진 가을날들이 어느덧 성큼 다가와 있지는 않을까? 이렇게 실천의 묘미를 느끼다 보면, 멋진 가을날을 넘어서 멋진 겨울, 그 이듬해 봄... 이렇게 무던히 아름다운 삶의 고삐를 스스로 쥐고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내 인생 자체가 멋진 날들의 연속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느 무료하면서도 멋진 팔월의 끝자락에서 입가에 조용히 미소를 머금으며 상념에 잠겨본다. 나의 작고도 당찬 야심들이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힘차게 빌어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