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서일까요? 마지막 밥 한 술을 뜰 때까지 따끈한 찌개를 후후 불며 먹을 수 있답니다.
뚝배기가 한국 사람들의 성품과 닮았다고들 합니다. 은근, 끈기, 변함없음 등등.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네 근대화 과정을 살펴보면 뚝배기의 느낌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빨리 빨리, 남보다 먼저,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오히려 남들이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빨리 빨리 문화는 효율적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생기는 것 같아 염려가 됩니다.
작년 추석연휴로 기억합니다. ‘라디오 스타’라는 영화가 있었지요. 단 한 곡의 히트곡이 있었을 뿐인데, 자신을 최고 인기 록가수라고 생각하는 ‘최곤(박중훈 분)’과 그의 헌신적인 매니저 ‘박민수(안성기 분)’의 이야기입니다. 최곤은 반짝 인기가 시들고 대마초 사건, 폭행사건 등에 연루돼 연예계의 탕아로 추락하고 있었지요. 이런 최곤의 옆에는 늘 매니저 박민수가 있었습니다. 최곤의 재기를 굳게 믿으며 그를 위해 물심양면 도와주는 지원군이지요.
그동안 감춰져 있던 최곤의 끼가 발현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매니저 박민수의 응원과 노력 덕분이었을까요. 그는 영월지역의 라디오 방송 DJ를 통해 작은 영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외상값을 독촉하는 다방 종업원, 화투규칙을 물어오는 동네 할머니들, 집 나간 아버지를 찾는다는 아이, 취직자리를 알아봐 달라는 백수, 그리고 최곤을 우상으로 여기는 영월 유일의 괴짜 밴드 이스트리버 등 동네 사람들은 소소한 그들의 일상을 왕년의 인기 가수 최곤에게 털어놓습니다.
최곤과 박민수. 이들은 자본주의의 치열한 경쟁논리에서 약간 벗어나 평화로운 자연을 배경으로 새로운 일상을 살아갑니다. 영화는 이들의 관계를 통해 인간적인, 감성이 중심을 이루는 이상적인 사람살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안성기 씨와 박중훈 씨도 실제로 20여 년 동안 충무로에서 동고동락한 막역한 사이라고 하더군요. 물론 최곤과 박민수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가 아닙니다. 가수와 매니저로 매일 티격태격 하며, 최곤이 박민수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관계죠.
최곤과 박민수의 관계가 인간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최상의 모델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평등하지도 않거니와 주변 사람의 희생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박민수는 최곤의 재기를 위해 가정은 뒷전으로 한 채 하루 종일 최곤과 함께 합니다. 부인은 힘겹게 분식집 운영을 하고 있지만, 박민수는 이를 바라만 볼 뿐입니다.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 놀아줄 시간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최곤을 그럴 듯하게 성공시켰나요?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박민수는 감성을 우선하는 지독한 이상주의자이면서 이것도 저것도 이루지 못한 패배자처럼 보일 수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자꾸만 마음이 끌리는 것은 왜일까요?
흔히 머리가 커지면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특히 직장처럼 일을 통해 만난 사람들은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다르다고들 합니다. 서로 일로 엮여있고, 알게 모르게 경쟁하는 구도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인간관계는 어렵다는 것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곤과 박민수의 관계를 꿈꾸어 봅니다. 저만을 위한 박민수가 있었으면 좋겠고, 저 또한 누군가의 박민수이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더디지만 한 번 끓기 시작하면 그 온기가 오래도록 지속되는 뚝배기 같은 관계. 다소 투박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진심을 갖고 있는 최곤과 박민수 같은 관계. 이들의 인간적인 교감을 부러워하는 것이 저만의 공상은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