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제주도 여행길에 [태왕사신기] 세트장을 들렀다. 새로 도로를 내고 있는지 아스팔트가 튀는 길을 ‘정말 이런 길에 드라마 세트장이 있을 수 있나?’ 싶은 걱정을 하며 10분쯤 달리는데 민속촌보다 더 위풍당당한 규모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8,000원이라는 입장료가 과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어느 여행객 블로그에서 본 “생각보다 비싼 입장료, 들어가보니 값어치는 하는 듯”이라는 평을 믿어보기로 했다. [태왕사신기] 세트장은 김녕 만장굴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서 성산 일출봉이나 우도를 방문하고 나처럼 제주시에 숙소를 잡아 숙소로 돌아가기에 시간이 어중간한 사람들에게 권할만한 곳이다.
사실 드라마도 다 끝난 세트장에 가서 무얼 하겠나 하는 시니컬한 마음 반, 세트장 사업으로 사업 수지가 맞을까 하는 호기심 반으로 들어갔는데 이 곳에서 과거 CJ에 근무하면서 그렇게 꿈꿔오던 One source Multi use의 희망을 보게 된다. 과거 [태왕사신기]의 주요 배경이던 시장길, 연가려의 저택, 왕궁이 소품들까지 그대로 놓여 있는 그 곳에서 나는 마치 수지니가 된 듯한 기분으로 뛰어다녔다.
시장 거리에서는 상인인양 물건 파는 흉내를 내어 보고, 왕궁에서는 왕의 의자에 앉아 배용준의 대사를 읊어본다. 그러면서 한 시간 가량을 세트장에서 놀다보니 생전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던 고구려의 건축 양식이 대충 어떤 거구나 하는 감도 가질 수 있었다.
넓은 세트장인지라 곳곳에 까페며 선물가게가 있는데 배용준을 테마로 이것저것을 팔고 있고 또 그걸 사는 일본관광객들이 있어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내 생각 같아서야 이왕 시장 세트가 있는 곳에 고구려 의상 같은 걸 입고 보다 실감나게 팔았음 싶지만 지금의 정도로도 남양주 세트장이나 과거 가 본 적이 있는 야인시대 세트장 보다 생동감이 있다.
이 곳에 서 있으니 3년 전쯤 경기도의 제안으로 테마파크 사업을 검토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 때 구상하던 테마파크 사업이 바로 영화 세트장을 무대로 하는 테마파크 사업이었는데 워낙 투자 자금이 막대하게 드는 것이 문제이기도 했지만, 투자를 하지 않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테마파크를 만들만한 ‘테마’가 없다는 것이었다. ‘인디아나존스’나 ‘미키마우스’와 같은 시리즈물이 없는 한국 영화 시장에서 오랜 시간 동안 관객을 사로잡을만한 테마를 찾기란 쉽지 않았고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드라마가 끝난 지 2년 넘게 건재한 [태왕사신기] 세트장을 보며 과연 영화 테마파크도 가능성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생각하기를 잠시, 우리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에서의 한류 효과를 떠올려본다. 배용준, 권상우와 같은 한류스타를 만든 콘텐츠 역시 드라마였고, 그런 한류스타의 후광효과를 입고자 하였던 영화들은 대부분 실패하였다. 영화 수출 시장의 가장 큰 고객인 일본에게 이제 한류스타의 출연을 운운하여 영화를 선 판매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렇지만 여전히 드라마에서는 한류스타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가! 사실 한류스타가 꼭 아니더라도 한국 영화는 한류 거품 후 수출 규모 하락세를 보이는 반면 드라마 시장은 한류가 건재하다. 한류 콘텐츠는 뭐니뭐니해도 드라마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드라마는 다른 나라의 드라마에서 느낄 수 없는 ‘말도 안되고 뻔한 스토리이지만 긴장감을 매일 주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전통적인 엔터테인먼트인 영화시장에 비해 TV 콘텐츠 시장이 커지면서 이 시장에 기존의 영화 콘텐츠를 매체 포맷에 맞게 변경만 하여 채우는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는 TV 특화 콘텐츠인 드라마를 대중적으로 즐기고 키워왔기에, 그런 ‘한국 드라마’의 매력을 지속적으로 개발할 수 있었고 이것이 발전하여 세계적인 파급력을 갖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작년부터 시작된 불황 이후 수출지향 국가인 우리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수출 활로, 새로운 수출품을 개발하고자 하는 의지가 더욱 거세지고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수출품목들 중에서도 transition cost가 비교적 적게 들고 우리 문화까지 수출할 수 있는 ‘콘텐츠’를 보다 활발히 수출하고자 하는 의지는 특히 크다. 거기에 덧붙여 세계 미디어의 변화 추세인 Digitalization을 따라 잡아 Digital Contents 시장에서 역시 한류를 일으키고자 하는 바램 또한 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Digital Contents를 만듦에 있어 기존의 드라마와 거의 다를 바 없는 매력을 지닌 콘텐츠를 단지 길이만 짧게 하거나 결말 스토리만 여러 개 만들어 선보여 ‘차세대 한류 콘텐츠’라 제시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함을 느낀다. 심지어 이러한 시도마저도 시청률 저조라는 실패를 맞자 기존의 영화나 드라마를 디지털로 변환만 하여 재전송하는 것이 디지털 콘텐츠로서 가장 효율적이라는 견해가 속속 나오고 있어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가 그러했듯 새로운 미디어에는 그에 걸맞는 특징을 지닌 새로운 콘텐츠가 있어야 콘텐츠는 물론 미디어 역시 성장할 수 있고 그 성장 싸이클이 계속 순환하여 강력한 매체로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이리라. 우리나라에 제 2의 배용준이 나오고 [태왕사신기]와 같은 대박 수출 콘텐츠가 나오기를 기대한다면, 현재의 한류에 만족하여 그 그늘 아래에 있으려고만 하지 말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Digital만의 특징을 지닌 Digital 콘텐츠를 개발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Transition Cost를 더욱 줄여 수출이 훨씬 용이해질 디지털 시대에 현재의 한류 드라마 열풍보다 더 거센 ‘디지털 한류’를 일으킬 수 있는 디지털 콘텐츠가 나오기를 희망하며 [태왕사신기] 세트장을 떠났다.